AI 가속기 하나를 뜯어보면 까만 칩 밑에 초록색 판이 깔려 있습니다. 서버용으로 쓰이는 이 판은 PC용보다 면적이 네 배 넘게 크고, 배선 층이 스무 겹 이상 쌓여 있습니다. 반도체 기판이라 부르는 이 물건은 칩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칩도 신호를 밖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이것이 휘면 그 위에 얹힌 수천억원짜리 칩이 통째로 못 쓰게 됩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총정리 4부에서 우리는 첨단 패키징을 ‘미세공정이 포기한 성능을 넘겨받은 자리’라고 정리했습니다. 기판은 그 이야기의 아래층입니다 — 칩을 만드는 회사들이 ‘우리 일이 아니다’며 넘겼는데, 지금은 그 판을 못 구하면 칩을 팔 수 없게 된 자리. 오늘 볼 회사는 그 판을 만듭니다.
1. 왜 지금 삼성전기인가 — 소부장 지도에서 비어 있던 칸
반도체 소부장 히어로즈에서 다뤄온 회사들에는 한 가지 패턴이 있었습니다. HPSP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던 고압 어닐링이라는 좁은 공정을 떠맡아 세계에서 유일한 회사가 됐고, 리노공업은 양산용에 비해 돈이 안 된다고 여겨지던 연구개발용 소켓을 떠맡아 업황과 무관한 방어력을 얻었으며, 원익QnC는 쿼츠라는 소모성 소재를 떠맡았습니다. 화려하지 않은 자리를 떠맡은 것이 결국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자리가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 시리즈에 아직 다루지 않은 칸이 하나 있습니다. 반도체 패키지 기판입니다. 밸류체인 총정리 4부는 후공정을 공정과 장비 중심으로 다뤘고, 그 공정에 쓰이는 소재와 부품은 소부장 히어로즈가 나눠 맡아왔습니다. 웨이퍼를 담고 다루는 쿼츠(원익QnC)가 그랬듯, 칩이 앉는 기판도 이 시리즈의 자리입니다.
다만 이 칸에 서 있는 회사는 앞서 다룬 회사들과 성격이 다릅니다. 삼성전기는 강소기업이 아니라 연 매출 11조원대의 대기업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 자체가 이 계층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 반도체 기판은 좁고 화려하지 않은 자리인 것은 맞는데, 강소기업이 떠맡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조 단위 설비 투자가 있어야 진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부장 히어로즈에서 확인해온 ‘좁은 자리를 떠맡아 대체 불가능해진다’는 패턴이 여기서는 다르게 작동하고, 그 이유가 이 편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한 가지 미리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이 회사는 피지컬 AI 시리즈의 센서 히어로즈 ②편에서 이미 한 번 다뤘습니다. 그 편은 휴머노이드 로봇에 들어가는 카메라 모듈과 부품을 중심으로 봤고, 이 편은 반도체 기판과 AI 서버용 MLCC를 중심으로 봅니다. 같은 회사를 두 번 다루는 이유는 두 사업의 기술 원리도, 성공 조건도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카메라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그 편을, 반도체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이 편을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글이 묻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서버용 반도체 기판은 무엇이 그렇게 어려운가, 세계 1위 일본 업체와의 격차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사상 최대 실적이 사이클 덕분인지 구조가 바뀐 결과인지 어떻게 구분하는가.
삼성전기, 한눈에 보기
📌 기본 정보 티커: 코스피 009150 | 설립: 1973년 삼성그룹 계열의 전자부품 전문기업으로 설립돼 1979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고, 1991년 반도체 기판 사업을 시작 | 사업 구성: 컴포넌트(MLCC 등 수동부품) 약 48%·광학솔루션(카메라 모듈) 약 30%·패키지솔루션(반도체 기판) 약 22%(2026년 2분기 매출 기준, 반도체 관련 매출은 컴포넌트와 패키지솔루션에 나뉘어 잡힘) | 지배구조: 삼성전자가 보통주 기준 23.69%(1,769만 3,084주)를 보유한 최대주주 | 시장 내 위치: MLCC 세계 2위, 국내 최초 서버용 FC-BGA 양산 업체이자 최고사양 모바일 AP용 기판 1위 | 한 줄 정체성: 칩을 만들지 않으면서 그 칩이 성능을 낼 수 있게 하는 판과 부품을 만드는 회사이자, 일본이 오래 쥐어온 두 시장에 자본으로 진입한 종합 전자부품 기업
2. 이 회사는 무엇을 팔아 어떻게 돈을 버는가
사업은 세 부문이지만 반도체와 닿는 것은 둘입니다. 컴포넌트의 MLCC와 패키지솔루션의 반도체 기판입니다. 두 부문을 합치면 2026년 2분기 매출의 70%가량이며, 지금 이 회사의 이익 개선을 만들고 있는 것도 이 둘입니다.
패키지솔루션 — 매출은 가장 작은데 투자가 가장 몰리는 사업
반도체 칩을 얹고 그 칩이 바깥과 신호를 주고받게 해주는 기판을 만듭니다. 회사는 1991년 이 사업을 시작해 휴대폰 AP용 기판에서 먼저 자리를 잡았고, 최고사양 모바일 AP용 반도체 기판에서는 점유율과 기술력 모두 선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2년 10월 국내 최초로 서버용 FC-BGA 양산을 시작하며 훨씬 어려운 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삼성전기 FC-BGA 사업이 속한 이 부문은 세 부문 중 매출 규모가 가장 작은데, 회사에 남기는 몫은 가장 큽니다 — 얼마나 큰지는 6절에서 부문별로 확인하겠습니다. 이 격차가 회사의 모든 의사결정을 설명합니다 — 2026년 7월 부산 사업장에 2040년까지 총 15조원을 투자해 고성능 패키지 기판과 고부가 MLCC의 마더라인이자 연구개발 거점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공시했는데, 그 돈이 향하는 곳이 바로 이 두 사업입니다.
고객 명단도 바뀌었습니다. 2023년 7월 AMD와 고성능 컴퓨팅 서버용 FC-BGA 공급 계약을 맺어 양산을 시작했고, 2026년 6월에는 퀄컴의 AI 가속기용 FC-BGA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휴대폰 부품 회사에서 AI 반도체 부품 회사로 옮겨가는 과정이 계약 하나하나로 기록되고 있는 셈입니다.
컴포넌트 — MLCC, 그리고 AI 서버가 바꿔놓은 수요
MLCC는 전기를 잠깐 담았다가 내보내며 전압의 출렁임을 잡아주는 부품입니다. 세계 시장에서 일본 무라타가 40% 이상, 삼성전기가 20%대로 2위이며 타이요유덴·TDK·야교 등이 뒤를 잇습니다. 오랫동안 이 순위는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I 서버가 그 구도를 흔들고 있습니다. 2026년 2분기 이 부문 매출은 1조6,494억원으로 1년 전보다 29% 늘었고, 성장을 만든 것은 AI 서버와 네트워크, 데이터센터 전력용 MLCC였습니다. 회사는 서버 CPU와 AI 가속기 양산 이력을 기반으로 신규 빅테크향 데이터센터 네트워크용 신제품 공급을 시작했다고 밝혔고, 2026년 6월에는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과 MLCC 장기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수동부품에서 장기 계약이 나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닙니다 — 그만큼 수급이 빠듯하다는 뜻입니다.
광학솔루션 — 반도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업
스마트폰과 자동차용 카메라 모듈을 만듭니다. 2026년 2분기 매출은 1조362억원으로 1년 전보다 10% 늘었지만, 컴포넌트가 29% 늘어난 것과 비교하면 성장세가 완만합니다. 세 부문 중 반도체와 직접 닿지 않는 유일한 부문이기도 합니다.
이 부문의 자세한 이야기와 로봇용 비전 사업은 피지컬 AI 시리즈 센서 히어로즈 ②편에서 다뤘습니다. 다만 한 가지만 짚어두면, 이 부문의 성장이 느린 것이 앞의 두 부문에 투자가 집중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회사가 어디에 미래를 걸었는지는 부문별 성장률 격차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이 회사에서 ‘반도체 매출’을 어떻게 세는가 이 회사는 반도체 관련 매출을 따로 공시하지 않습니다. 반도체에 쓰이는 물건이 두 부문에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기판은 패키지솔루션에, MLCC는 컴포넌트에 잡힙니다. 그런데 MLCC는 반도체에만 쓰이는 부품이 아닙니다. 스마트폰과 자동차에도 수백에서 수천 개씩 들어갑니다. 따라서 컴포넌트 매출 전체를 반도체 매출로 보면 과대 계산이 되고, 패키지솔루션만 보면 과소 계산이 됩니다. 이 글에서는 두 부문을 합쳐 약 70%라고 쓰되, 그중 순수하게 AI 반도체에서 나오는 몫은 그보다 작다는 점을 전제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회사가 실적 설명에서 ‘AI 서버용’이나 ‘데이터센터용’이라고 명시한 부분이 그 몫을 가늠하는 유일한 단서입니다.
3. 핵심 기술 — 원리로 파고들기
여기서부터가 이 글의 본론입니다. 이 절을 읽는 렌즈를 하나 먼저 드리겠습니다. 반도체 기판과 MLCC는 겉보기에 전혀 다른 물건이지만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 층을 얇게, 그리고 많이 쌓아야 하는데, 층을 쌓을수록 뒤틀리고 불량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틀림을 얼마나 잡아내느냐가 곧 수율이고, 수율이 이 사업의 승부처입니다. 아래에서 서버용 기판이 왜 어려운지(①), 그 어려움이 왜 수율 문제로 귀결되는지(②), AI 서버용 MLCC가 왜 다른 물건인지(③), 그리고 회사가 차세대로 걸고 있는 유리기판이 무엇인지(④)를 보겠습니다. MLCC의 적층 원리와 기판의 기본 구조는 피지컬 AI 센서 히어로즈 ②편에서 이미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그 위에서 반도체용이 왜 다른 물건이 되는지에 집중하겠습니다.
① 서버용 기판 — 면적 네 배, 층수 스무 겹의 세계
반도체 기판이 하는 일은 통역입니다. 칩 안의 배선은 나노미터 단위이고 메인보드의 배선은 밀리미터 단위인데, 그 사이를 층층이 넓혀가며 이어주는 것이 기판의 역할입니다. 여기까지는 휴대폰용이든 서버용이든 같습니다.
달라지는 지점은 규모입니다. 회사 설명에 따르면 서버용 FC-BGA는 일반 PC용보다 기판 면적이 4배 이상 크고, 층수도 20층 이상으로 2배 넘게 많습니다. 왜 이렇게 커졌을까요. 서버용 CPU와 GPU는 연산 능력과 신호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하나의 기판 위에 여러 개의 칩을 함께 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밸류체인 4부에서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칩을 하나의 패키지 안에 함께 넣는 첨단 패키징’을 다뤘는데, 그 칩들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바로 이 커진 기판입니다.
칩이 여러 개면 그 칩들끼리 주고받는 신호선도 폭증합니다. 신호선이 늘면 한 층에 다 깔 수 없으니 층을 올려야 하고, 층이 늘면 위아래를 잇는 미세한 구멍을 뚫어 채워야 합니다. 20층짜리 기판이란 그 작업을 스무 번 반복하면서 매 층의 배선 위치를 마이크론 단위로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 쉽게 비유하면 — 스무 장의 도면을 겹쳐 구멍을 뚫기 투명한 도면 스무 장을 정확히 포개놓고, 정해진 지점에 위에서 아래까지 관통하는 구멍을 수천 개 뚫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장이라도 조금 밀려 있으면 구멍이 배선을 비껴가고, 그 지점의 신호는 끊깁니다. 게다가 이 도면들은 붙이는 과정에서 열을 받습니다. 재료마다 열에 늘어나는 정도가 달라서, 굳고 나면 전체가 미세하게 휘어버립니다. 종이 스무 장을 풀로 붙여 말리면 가장자리가 들뜨는 것과 같은 일이 마이크론 단위로 벌어집니다. 그리고 판이 클수록 이 휨은 심해집니다. 손바닥만 한 판이 0.1밀리미터 휘는 것과 그보다 네 배 큰 판이 같은 비율로 휘는 것은 결과가 다릅니다. 서버용 기판이 어려운 이유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것입니다 — 커질수록 휘고, 층이 많을수록 어긋납니다.
② 그래서 승부는 수율에서 갈립니다
앞의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결론이 있습니다. 서버용 기판은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만든 것 중 몇 개가 쓸 수 있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설계와 공정은 이미 공개된 영역이고, 진짜 차이는 완성된 판 100장 중 몇 장이 규격을 통과하느냐에서 납니다.
이 회사가 세계 1위 이비덴과 벌리고 있는 격차도 정확히 여기 있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기술 자체는 뒤지지 않지만 하이엔드 제품의 대량 생산 국면에서 안정적인 고수율을 확보하는 것이 숙제라는 평가입니다. 회사 관계자도 기술력 측면에서는 대만 유니마이크론이나 일본 이비덴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 표현이 ‘기술력’에 한정돼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만합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수율은 공시되지 않습니다 이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인 수율은 어느 회사도 공시하지 않습니다. 경쟁사에게 직접적인 정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간접 지표로 읽어야 합니다. 가장 정직한 대리 지표가 부문 영업이익률입니다. 기판 사업은 원재료비와 감가상각비가 미리 정해져 있고, 불량이 나면 그 비용이 통째로 버려집니다. 즉 수율이 오르면 같은 매출에서 남는 돈이 늘어납니다. 매출은 그대로인데 이익률이 오른다면 수율이 개선된 것이고, 매출이 늘어도 이익률이 제자리라면 물량으로 채운 것입니다. 두 번째 지표는 고객 명단입니다. 하이엔드 서버용 기판은 고객사가 자기 칩을 얹어보고 통과해야 채택되는데, 그 검증 자체가 수율 심사에 가깝습니다. AMD에 이어 퀄컴의 AI 가속기용 물량이 붙었다는 것은 그 심사를 두 번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는 증설 결정입니다. 수율이 낮은 상태에서 라인을 늘리면 불량만 늘어납니다. 회사가 대규모 증설을 결정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수율에 자신이 생겼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이 회사에게 유리한 구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세계 1위 이비덴이 엔비디아와 깊게 엮이면서, 구글·아마존·브로드컴·퀄컴·테슬라처럼 자체 AI 칩을 만드는 빅테크들이 두 번째 공급처를 필요로 하게 됐다는 점입니다. 특정 국가나 특정 업체에 의존도가 쏠리는 것을 피하려는 흐름까지 겹쳐, 이 회사가 ‘가장 신뢰할 만한 제2 공급망’으로 거론되는 상황입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시리즈에서 반복해 확인한 대로, 이 산업에서는 기술만큼이나 ‘누가 1위에게 묶여 있지 않은가’가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③ AI 서버용 MLCC — 같은 부품인데 다른 물건입니다
MLCC의 기본 원리, 즉 얇은 세라믹 층과 전극을 수백 겹 쌓아 작은 부피에 큰 용량을 담는다는 구조는 피지컬 AI 센서 히어로즈 ②편에서 다뤘습니다. 여기서 볼 것은 AI 서버용이 왜 별개의 물건 취급을 받는가입니다.
AI 가속기는 전력을 순간적으로, 그리고 대단히 크게 끌어씁니다. 연산이 몰리는 순간 수백 암페어가 한꺼번에 흐르는데, 그때 전압이 잠깐이라도 규정 아래로 떨어지면 칩이 오작동합니다. 그 순간을 메워주는 것이 칩 바로 옆에 촘촘히 박힌 MLCC입니다. 즉 서버용 MLCC는 ‘전기를 담는 그릇’이라기보다 ‘순간적으로 전기를 쏟아붓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이 용도에서 요구되는 성질이 일반 제품과 다릅니다. 첫째, 반응이 빨라야 합니다. 담긴 전기를 얼마나 빨리 내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 부품 내부의 인덕턴스를 최대한 줄여야 합니다. 둘째, 뜨거운 환경에서 용량이 떨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AI 가속기 주변은 상시 고온이라, 상온에서 규격을 맞춘 제품이 실제 환경에서는 성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셋째, 개수가 많아 하나만 불량이어도 보드 전체가 문제가 됩니다.
이 조건을 다 맞춘 고사양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회사가 사실상 무라타와 삼성전기 둘뿐이라는 것이 업계의 평가입니다. 세계 전체 MLCC 시장에서는 무라타 40%대·삼성전기 20%대의 구도가 오래 이어져 왔지만, AI 서버용이라는 좁은 구간에서는 두 회사가 시장을 나눠 갖고 1~2위를 다투는 형태입니다. 일부 증권사는 AI 서버와 특정 빅테크의 자체 칩 영역에서는 이 회사가 무라타를 넘어선 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수급 상황도 숫자로 나타납니다. 수주액을 출하액으로 나눈 값이 1을 넘으면 주문이 생산을 앞선다는 뜻인데, 이 지표가 2025년 말 1.0 수준에서 1.2~1.3까지 올라간 것으로 분석됩니다. 가동률은 95~100% 수준으로 사실상 풀가동입니다. 무라타 경영진도 최첨단 MLCC에 대한 문의가 현재 생산능력의 두 배에 달한다고 밝혔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국면이며, 그것이 가격 인상 논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④ 유리기판 — 회사가 차세대로 걸고 있는 판
네 번째는 아직 매출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반도체 기판은 가운데에 플라스틱 계열 재료로 만든 심을 두고 그 위아래로 배선 층을 쌓는 구조입니다. 이 심을 유리로 바꾸자는 것이 유리기판입니다.
이유는 ①에서 본 문제로 돌아갑니다. 플라스틱 계열 재료는 열을 받으면 늘어나고 뒤틀립니다. 유리는 훨씬 덜 변형되고 표면이 평평해, 같은 면적에 더 미세한 배선을 더 정확히 깔 수 있습니다. 판이 커지고 층이 늘어날수록 이 차이는 결정적이 됩니다. 업계에서 유리기판을 차세대 게임 체인저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이 회사는 2026년 일본 스미토모화학의 자회사 동우화인켐과 유리기판 생산 합작사를 설립하며 지분 66.2%를 확보했습니다. 두 회사가 합쳐 5,000억원가량을 출자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일정은 이미 한 번 밀렸습니다 — 합작사 설립 당시에는 2027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제시했는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2분기 실적 발표에서 2028년으로 조정했습니다.
이 지연 자체가 이 기술의 난도를 보여줍니다. 유리는 변형이 적은 대신 깨집니다. 얇게 만들수록, 그리고 구멍을 많이 뚫을수록 깨지기 쉬워집니다. 회사 경영진도 기술 난도가 높고 수율 확보가 관건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②에서 본 수율 문제가 차세대 제품에서도 그대로 반복되는 셈입니다.
⑤ 네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는 곳
지금까지 본 넷은 따로 떨어진 기술이 아닙니다. AI 가속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에서 전부 만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의 칩을 하나의 큰 기판 위에 얹고, 그 기판은 20층 넘게 쌓여 있으며, 칩 바로 옆에는 순간 전류를 받쳐줄 MLCC가 촘촘히 박히고, 그 모든 것을 앞으로는 유리 심 위에 올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회사의 두 사업은 서로 다른 사업이 아니라 같은 고객의 같은 제품 안에서 만나는 사업입니다. AI 가속기를 만드는 빅테크 입장에서는 기판과 MLCC를 한 회사에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실질적인 이점이 되고, 회사 입장에서는 한 고객에게 두 품목을 팔 수 있게 됩니다. 부산 사업장에 15조원을 투입해 고성능 패키지 기판과 고부가 MLCC를 한 거점에서 키우겠다고 한 것도 이 구조를 염두에 둔 결정으로 보입니다.
⚠️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들 첫째, 하이엔드 수율입니다. 이 편에서 반복해 짚은 대로 이비덴과의 격차가 여기 있고, 이 숫자는 공시되지 않아 외부에서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 추가 증설의 실행입니다.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한 추가 생산능력 투자가 거론되고 있으나, 규모가 커서 자체 자금만으로는 부담이 크고 고객사의 선행 발주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투자 결정이 실제로 공시되기 전까지는 계획입니다. 셋째, 유리기판입니다. 가동 목표가 이미 2027년 하반기에서 2028년으로 한 차례 밀렸고, 업계에서는 장비 발주 일정을 감안하면 그보다 더 늦어질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넷째, MLCC 가격 인상입니다. 수급이 빠듯한 것은 분명하나 실제 인상이 언제 어느 폭으로 이뤄질지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2026년 실적 전망이 증권사마다 크게 갈리는 가장 큰 이유가 이 가정 차이입니다.
4. 왜 경쟁사는 따라오지 못하는가 — 그리고 그 이유가 언제까지 유효한가
3절을 정리하면 이 회사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세 겹입니다. 첫째, 1991년부터 기판을 만들며 쌓은 공정 데이터와 인력. 둘째, 조 단위 설비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자본. 셋째, 세계 1위에게 묶여 있지 않다는 위치입니다.
이 중 두 번째가 소부장 히어로즈에서 다룬 다른 회사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입니다. HPSP나 리노공업이 서 있는 자리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아서 비어 있던 자리’였습니다. 반면 서버용 기판은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자리입니다 — 부산 한 곳에만 15조원을 넣겠다는 규모의 투자가 있어야 진입이 되기 때문입니다. 좁은 자리인 것은 같은데, 그 좁음의 성격이 다릅니다.
세 번째도 이 시리즈에서 반복해 확인한 구조입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허브에서 정리한 대로 이 산업에서는 남이 넘긴 자리를 떠맡아 대체 불가능해지는 길이 있는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 고객이 그 자리를 한 회사에만 맡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비덴이 엔비디아와 깊게 엮일수록 나머지 빅테크들에게는 제2 공급처가 필요해지고, 그 필요가 이 회사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이 우위는 조건부입니다
첫째, 앞의 세 겹 중 어느 것도 수율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래 만들었다고, 돈이 많다고, 고객이 원한다고 해서 20층짜리 큰 판이 안 휘는 것은 아닙니다. 3절 ②에서 짚은 대로 기술 자체보다 대량 생산 국면의 안정적 고수율이 숙제로 남아 있고,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이 우위는 잠정적입니다.
둘째, 자본이 진입장벽이라는 것은 자본을 가진 다른 회사도 들어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강소기업이 못 들어오는 자리인 것은 맞지만, 대만과 일본의 기존 업체들은 물론 다른 대형 부품사도 같은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무라타가 MLCC 설비투자를 대폭 늘린 것처럼, 이 시장의 증설 경쟁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셋째, 제2 공급처라는 위치 자체가 양날입니다. 고객이 나를 부르는 이유가 ‘1위가 부담스러워서’라면, 1위의 공급이 넉넉해지는 순간 그 이유가 사라집니다. 이 위치를 실력으로 바꾸려면 결국 첫 번째 조건인 수율로 돌아가야 합니다.
📌 그래서 무엇으로 판별할 것인가 — 수율이 곧 점유율입니다 위의 논의를 하나의 판별식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삼성전기 FC-BGA 사업이 진짜로 자리를 잡았는지는 매출 성장률이나 수주 소식으로는 알 수 없고, 수율이 올랐는지로 판가름 납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은 수급이 빠듯한 국면이라 수율이 낮아도 만드는 대로 팔립니다. 하지만 증설이 한 바퀴 돌아 공급이 늘어나면, 남는 것은 개당 원가 차이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업에서 개당 원가를 결정하는 것은 설비 가격도 인건비도 아닌 수율입니다 — 불량 하나가 나면 그 판에 들어간 재료비와 20번의 공정 비용이 통째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수율은 공시되지 않으므로 3절 ②의 세 가지 간접 지표로 읽습니다. 패키지솔루션 부문 영업이익률, 하이엔드 고객 명단의 추가, 그리고 대규모 증설 결정. 이 셋이 함께 움직이면 수율이 실제로 개선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피지컬 AI 센서 히어로즈 ②편에서 이 회사에 적용한 판별식은 ‘로봇 한 대에서 얼마를 가져가는가’였습니다. 같은 회사인데 기준이 다른 이유는 두 사업의 성공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로봇에서는 아직 시장 자체가 작아 품목 수가 관건이고, 반도체에서는 시장이 이미 커서 원가가 관건입니다.
5. 경쟁·협력 지도 — 삼성전기를 둘러싼 큰 그림
한 회사를 이해하려면 누구와 싸우고 누구에게 팔며 누구에게 기대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이 회사의 반도체 지도에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 경쟁자는 거의 전부 일본과 대만에 있고, 고객은 거의 전부 미국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 이 회사가 서 있습니다.
층을 나눠 보시면 더 선명해집니다. 기판에서는 일본 이비덴과 대만 유니마이크론을 상대하고, MLCC에서는 일본 무라타를 상대하며, 유리기판에서는 아직 승자가 없는 시장에서 일본 업체들과 선행 투자 경쟁을 벌입니다. 세 싸움 모두 상대가 오래 앞서 있던 시장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 글로벌 라이벌
- 이비덴 [도쿄 4062] 서버용 FC-BGA 세계 1위로, 이 회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겨루는 상대입니다. 압도적인 수율과 엔비디아를 비롯한 빅테크와의 견고한 관계가 강점입니다. 다만 그 관계의 깊이가 역설적으로 다른 빅테크들에게 제2 공급처를 찾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 유니마이크론 · 난야 · AT&S [대만·오스트리아] FC-BGA 시장을 이비덴과 함께 나눠 온 업체들입니다. 회사는 기술력 측면에서 이들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밝혀왔으며, 실제 경쟁은 하이엔드 구간의 수율과 증설 속도에서 갈립니다.
- 무라타제작소 [도쿄 6981] MLCC 세계 1위로 40% 이상을 점유합니다. 다만 AI 서버용이라는 좁은 구간에서는 이 회사와 시장을 나눠 갖는 구도이며, 양측 모두 증설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무라타가 AI용 MLCC 가격 인상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이 회사 주가에 영향을 준 것도 두 회사가 사실상 한 묶음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 타이요유덴 · TDK · 야교 [일본·대만] MLCC 시장의 3~5위권 업체들로 각각 10~20%대를 점유합니다. 범용 구간에서는 치열하게 겹치지만, 이 편이 다루는 고사양 AI 서버용에서는 상위 두 곳과 격차가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 핵심 고객사
- AMD [나스닥 AMD] 2023년 7월 고성능 컴퓨팅 서버용 FC-BGA 공급 계약을 맺고 양산을 시작한 첫 대형 서버 고객입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허브의 ‘AI 반도체, 또 다른 승자들 ③’에서 다룬 회사이기도 해, 그 편과 이 편을 함께 읽으면 같은 칩을 설계 쪽과 부품 쪽에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 퀄컴 [나스닥 QCOM] 2026년 6월 AI 가속기용 FC-BGA 양산에 들어간 고객입니다. 데이터센터로 협력이 확장된 사례이며, 서버용 기판 심사를 두 번째로 통과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글로벌 클라우드 · 빅테크 고객군 [미국 중심] 2026년 6월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과 MLCC 장기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수동부품에서 장기 계약이 나오는 것은 이례적이며, 수급이 빠듯하다는 신호이자 품질 검증을 통과했다는 신호로 함께 읽힙니다. 자체 AI 칩을 만드는 빅테크들이 제2 공급처를 찾는 흐름의 수혜 자리이기도 합니다.
- 삼성전자 및 계열사 [코스피 005930] 최대주주이자 주요 고객입니다. 다만 이 편이 다루는 서버용 기판과 AI 서버용 MLCC의 성장은 계열 물량이 아니라 해외 빅테크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계열 의존을 줄여가는 과정이 곧 이 사업의 성장 과정입니다.
🇰🇷 국내 협력 생태계
- 동우화인켐 [일본 스미토모화학 계열] 유리기판 생산 합작사의 파트너입니다. 이 회사가 지분 66.2%를 확보했고 두 회사가 합쳐 5,000억원가량을 출자하는 구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재는 일본에서, 양산은 국내에서 맡는 형태입니다.
- 한미반도체 · 하나마이크론 · 이오테크닉스 [코스피 042700 · 코스닥 067310 · 039030] 반도체 밸류체인 후공정 칸의 동료들입니다. 한미반도체는 칩을 쌓는 장비를, 하나마이크론은 패키징 외주를, 이오테크닉스는 레이저 공정 장비를 맡습니다. 이 회사가 만드는 기판은 그 칩들이 최종적으로 앉는 자리라,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서 같은 패키지 안에서 만납니다.
- 국내 소재·부품 협력사군 [국내] 기판 원재료인 동박적층판과 MLCC용 유전체 분말을 공급하는 협력사들입니다. 다만 일부 핵심 소재는 여전히 일본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3절에서 본 기술 경쟁과 별개로 공급망 측면의 제약이 남아 있습니다.
이 지도를 한 걸음 물러나 보면 이 회사의 위치가 드러납니다. 기판에서도 MLCC에서도 세계 1위는 일본이고, 이 회사는 두 시장 모두에서 2위입니다. 그런데 그 2위라는 자리가 지금은 약점이 아니라 자산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 고객이 1위 한 곳에 전부를 맡기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허브에서 정리한 ‘넘겨준 자리가 다음 권력이 된다’는 문장에 이 편이 더하는 단서가 이것입니다. 자리를 넘겨받는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 1위가 너무 커져서 고객이 불안해질 때, 그 불안이 2위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6. 숫자로 보는 지금 — 구조가 숫자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앞에서 본 구조가 실제 숫자에 어떻게 찍히는지 보겠습니다. 이 표에서 중요한 것은 매출의 크기가 아니라, 이익이 매출보다 훨씬 빠르게 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이유입니다.
표를 좌우로 밀어서 보실 수 있습니다.
| 구분 | 매출 | 영업이익 | 비고 |
| 2025년(확정) | 11조 3,145억원 | 9,133억원 | 매출·영업이익 모두 창사 이래 최대. 영업이익률은 8.1% 수준 |
| 2026년 1분기(확정) | 3조 2,091억원 | 2,806억원 | 전년 동기 대비 매출 17.2%·영업이익 39.9%·순이익 86.3% 증가. FC-BGA 가격 인상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분기이며, 일회성 비용이 일부 반영된 것으로 알려짐 |
| 2026년 2분기(확정) | 3조 4,572억원(YoY +24%) | 4,404억원(YoY +107%) | 영업이익률 12.7%, 순이익 3,157억원. 부문별로 컴포넌트 1조 6,494억원(YoY +29%), 광학솔루션 1조 362억원(YoY +10%). 회사는 AI 서버·네트워크·전장용 MLCC와 글로벌 빅테크향 FC-BGA 공급 확대를 개선 요인으로 설명 |
⚠️ 숫자를 볼 때 주의할 점 2025년과 2026년 1·2분기는 회사가 공시한 확정 실적입니다. 이 편의 다른 수치 중 다음은 회사 설명이거나 추정입니다 — MLCC 세계 점유율(무라타 40%대·이 회사 20%대는 업계 집계이며 기관별 편차 있음), AI 서버용 구간의 점유율 우위(일부 증권사 추정), 수주액 대비 출하액 비율 1.2~1.3과 가동률 95~100%(증권사 분석), 이비덴과의 수율 격차(업계 평가이며 양사 모두 수율을 공시하지 않음), 2028년 가동 목표 추가 증설(투자 결정 전). 특히 반도체 관련 매출은 별도 부문으로 공시되지 않습니다. 기판은 패키지솔루션에, MLCC는 컴포넌트에 나뉘어 있고 컴포넌트 안에는 비반도체 물량도 섞여 있어, 이 편이 다루는 사업의 정확한 크기는 외부에서 계산할 수 없습니다.
표에서 가장 눈여겨볼 곳은 2026년 2분기의 비율입니다. 매출이 24% 늘어나는 동안 영업이익이 107% 늘었습니다. 네 배 넘는 차이입니다. 이런 일은 늘어난 매출이 대부분 고부가 제품에서 나왔거나, 같은 제품을 더 비싸게 팔았거나, 아니면 만드는 비용이 줄었을 때 생깁니다. 회사 설명과 증권가 분석을 종합하면 세 가지가 모두 작용했습니다 — AI 서버용 제품 비중이 늘었고, FC-BGA 가격 인상이 반영됐으며, 가동률이 올라 개당 원가가 내려갔습니다.
두 번째로 볼 것은 연간 이익률과 분기 이익률의 차이입니다. 2025년 연간 8.1%였던 것이 2026년 2분기에는 12.7%가 됐습니다. 4.6%포인트 차이인데, 이 회사 규모에서 이 정도 개선은 사업 구성이 실제로 바뀌었을 때만 나옵니다. 다만 4절의 판별식을 다시 불러오면, 이 개선 중 얼마가 수율에서 왔고 얼마가 가격에서 왔는지는 아직 구분되지 않습니다. 가격은 사이클이고 수율은 체질입니다.
세 번째는 부문별 성장률의 격차입니다. 컴포넌트가 29% 늘 때 광학솔루션은 10% 늘었습니다. 세 배 가까운 차이이고, 이 격차가 부산 15조원이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마트폰 부품 회사가 AI 반도체 부품 회사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과정이 부문별 숫자에 그대로 찍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표에 없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편에서 가장 중요한 숫자인 수율은 어느 행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의 성패를 가를 유리기판 매출도 없습니다. 재무제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며, 그래서 4절에서 세운 판별식이 간접 지표 세 가지를 함께 보라고 한 것입니다.
7. 그늘도 있다 — 구조적 리스크
여기까지가 강점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제 반대편을 봐야 합니다. 단기 악재가 아니라 이 회사의 구조 자체에서 나오는 위험을 층위별로 짚겠습니다.
첫째, AI 투자 사이클에 실적이 통째로 묶여 있습니다. 지금의 개선은 거의 전적으로 AI 데이터센터 투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빅테크의 설비투자는 몇 년 단위로 몰렸다 끊기는 성격이고, 기판과 MLCC 모두 고정비가 무거운 장치 사업이라 수요가 꺾이면 가동률과 함께 이익이 빠르게 무너집니다. 소부장 히어로즈 앞선 편들에서 반복해 확인한 구조이며, 좋을 때 크게 좋은 만큼 나쁠 때 크게 나쁩니다.
둘째, 증설이 수요보다 먼저 집행돼야 합니다. 부산 15조원은 2040년까지의 계획이고,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한 추가 투자도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투자는 고객 물량이 확정되기 전에 결정해야 하고, 한 번 지으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일부 분석에서는 자체 자금만으로는 부담이 커 고객사의 선행 발주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보는데,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투자 일정 자체가 흔들립니다.
셋째, 수율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편에서 반복해 짚은 대로 하이엔드 대량 생산 국면의 안정적 고수율이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수급이 빠듯해 만드는 대로 팔리지만, 증설이 한 바퀴 돌아 공급이 늘면 개당 원가 차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수율입니다.
넷째, 두 시장 모두에서 2위입니다. 기판은 이비덴이, MLCC는 무라타가 앞서 있고 두 회사 모두 증설을 늘리고 있습니다. 5절에서 본 대로 지금은 ‘제2 공급처’라는 위치가 자산으로 작동하지만, 1위의 공급이 넉넉해지면 그 이유가 사라집니다. 위치를 실력으로 바꾸는 데 실패하면 사이클이 꺾일 때 가장 먼저 물량을 잃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섯째, 유리기판 일정이 이미 밀렸습니다. 합작사 설립 당시 2027년 하반기였던 가동 목표가 한 달도 되지 않아 2028년으로 조정됐고, 업계에서는 장비 발주 일정을 감안하면 더 늦어질 가능성도 거론됩니다. 차세대 게임 체인저로 기대받는 기술이지만, 기대와 일정 사이의 간극이 이미 한 번 확인된 셈입니다.
여섯째, 소재의 대외 의존입니다. 기판 원재료와 MLCC용 유전체 분말 일부는 여전히 일본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리기판 합작사의 파트너도 일본 화학사 계열입니다. 기술과 자본으로 일본을 따라잡는 사업인데 그 사업의 원재료를 일본에서 받는 구조라, 통상 마찰이나 공급 차질이 생기면 기술 경쟁과 무관하게 영향을 받습니다.
일곱째, 계열 의존과 사업 구성입니다. 삼성전자 및 계열사 매출 의존도가 30%에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어 전방 산업 부진의 영향을 직접 받습니다. 그리고 이 편이 다루지 않은 광학솔루션이 매출의 30%를 차지하는데, 그 부문의 성장은 다른 두 부문의 3분의 1 수준입니다. 회사 전체의 성적은 세 부문의 합이므로, 반도체 사업이 잘돼도 그 성과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구조입니다.
8. 이 회사가 말해주는 것 — 세 가지 해석
사실을 정리했으니 이제 해석입니다. 삼성전기를 통해 반도체 산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것 세 가지를 짚겠습니다.
① 넘겨준 자리를 떠맡는 방법이 하나 더 있습니다 — 사들이는 것
반도체 밸류체인 허브에서 정리한 이 시리즈의 관통 프레임은 ‘넘겨준 자리가 다음 권력이 된다’였습니다. TSMC는 팹리스들이 감당하지 못해 넘긴 공장을 떠맡았고, HPSP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던 좁은 공정을 떠맡았으며, 리노공업은 돈이 안 된다고 여겨지던 연구개발용 소켓을 떠맡았습니다. 공통점은 ‘아무도 원하지 않던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반도체 기판은 성격이 다릅니다. 이것도 칩 회사들이 넘긴 자리인 것은 맞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비어 있던 자리가 아니라 들어가려면 조 단위 돈이 드는 자리입니다. 부산 한 곳에만 15조원을 넣겠다는 규모가 그 증거입니다. 떠맡은 것이 아니라 사들인 셈이고, 그래서 이 자리에는 강소기업이 없습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방어력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아서 얻은 자리는 시장이 커져도 경쟁자가 잘 들어오지 않지만, 돈으로 산 자리는 돈을 가진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무라타가 MLCC 설비투자를 대폭 늘리고 이비덴이 증설을 이어가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소부장 기업을 볼 때 ‘이 회사는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물으시면, 그 답이 곧 그 자리를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② 1위가 너무 강해지면 2위의 자리가 생깁니다
5절에서 확인한 구조입니다. 이비덴이 엔비디아와 깊게 엮이면서, 자체 AI 칩을 만드는 다른 빅테크들이 제2 공급처를 필요로 하게 됐습니다. 특정 국가나 특정 업체에 의존이 쏠리는 것을 피하려는 흐름까지 겹쳐, 이 회사의 2위라는 위치가 오히려 자산이 됐습니다.
이 현상은 반도체 산업 전반에서 반복됩니다. 고객이 커질수록 공급망 안정이 성능만큼 중요해지고, 그러면 1등 하나에 전부를 맡기는 것 자체가 위험이 됩니다. 이 시리즈에서 다룬 앰코테크놀로지가 TSMC와 10년 장기계약을 맺은 것도, 하나마이크론이 국내 1위 OSAT로 자리 잡은 것도 결국 같은 원리 위에 있습니다 — 아무도 한 곳에만 맡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자산에는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1위가 공급을 넉넉히 갖추면 2위를 부를 이유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제2 공급처’라는 위치는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지 자리를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며, 그 시간 안에 실력을 증명해야 합니다. 4절에서 세운 판별식이 결국 수율로 돌아간 이유입니다.
③ 같은 회사도 어느 밸류체인에 놓느냐에 따라 다른 회사가 됩니다
이 회사는 피지컬 AI 시리즈에서 한 번, 반도체 시리즈에서 한 번, 모두 두 번 다뤄집니다. 그런데 두 편에서 내린 결론이 서로 다릅니다. 피지컬 AI 편에서는 ‘로봇을 서두를 이유가 없는 회사’였고, 이 편에서는 ‘반도체에 회사의 미래를 걸고 있는 회사’입니다. 둘 다 사실입니다.
판별식도 갈렸습니다. 로봇에서는 ‘한 대에서 얼마를 가져가는가’가 기준이었고, 반도체에서는 ‘수율이 오르는가’가 기준입니다. 로봇 시장은 아직 작아서 품목 수를 늘리는 것이 관건이고, 반도체 시장은 이미 커서 개당 원가가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회사인데 시장의 성숙도가 달라 성공 조건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볼 때 ‘이 회사는 무슨 회사인가’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답하기 어렵습니다. 정확한 질문은 ‘어느 밸류체인에서 보느냐’입니다. 같은 부품사가 어느 산업의 지도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강점과 약점이 뒤바뀌고, 봐야 할 숫자도 달라집니다. 이 시리즈가 기업을 밸류체인 위에 올려놓고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9. 이 회사를 계속 지켜보는 법
특정 날짜의 이벤트를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항목은 몇 달이면 낡습니다. 대신 몇 년이 지나도 유효한 질문 네 가지와, 각각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를 남깁니다.
첫째, 패키지솔루션 부문 영업이익률이 계속 오르는가. 4절에서 세운 판별식의 첫 번째 간접 지표입니다. 수율은 공시되지 않으므로 이 숫자로 읽어야 합니다. 다만 가격 인상 국면에서는 수율이 그대로여도 이익률이 오를 수 있으므로, 가격 인상이 일단락된 뒤에도 이익률이 유지되는지를 보셔야 합니다. 가격은 사이클이고 수율은 체질입니다.
둘째, 하이엔드 고객 명단에 이름이 추가되는가. AMD에 이어 퀄컴이 붙었습니다. 서버용 기판은 고객사가 자기 칩을 얹어 검증한 뒤에야 채택하므로, 새 이름이 하나 붙을 때마다 그 심사를 한 번 더 통과했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체 AI 칩을 만드는 빅테크가 추가되는지를 보시면 됩니다.
셋째, 대규모 증설이 실제로 결정되는가. 2028년 가동을 목표로 한 추가 투자가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 결정 전입니다. 수율이 낮은 상태에서 라인을 늘리면 불량만 늘어나므로, 증설 결정 자체가 내부적으로 수율에 자신이 생겼다는 신호가 됩니다. 투자 공시와 그 자금 조달 방식을 함께 보시면 됩니다.
넷째, 유리기판 일정이 더 밀리는가. 가동 목표가 2027년 하반기에서 2028년으로 이미 한 번 조정됐습니다. 차세대 기술은 원래 일정이 밀리지만, 반복해서 밀린다면 그 기술이 기대만큼 빨리 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장비 발주와 라인 구축 소식을 일정의 실질적 지표로 보시면 됩니다.
10. 마무리하며
삼성전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 칩을 만들지 않으면서 그 칩이 성능을 낼 수 있게 하는 판과 부품을 만드는 회사이자, 일본이 오래 쥐어온 두 시장에 자본으로 진입한 종합 전자부품 기업입니다. 기판에서도 MLCC에서도 세계 2위이고, 그 2위라는 자리가 지금은 자산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밸류체인 시리즈를 관통하는 문장은 ‘넘겨준 자리가 다음 권력이 된다’였습니다. 이 편이 그 문장에 더하는 단서는 둘입니다. 첫째, 넘겨받는 방법에는 떠맡는 것 말고 사들이는 것도 있습니다 — 다만 돈으로 산 자리는 돈을 가진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 방어력의 성격이 다릅니다. 둘째, 1위가 너무 커지면 고객이 불안해지고, 그 불안이 2위의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 다만 그것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지 자리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이 회사의 다음 몇 년을 결정하는 숫자는 매출도 수주도 아니고 수율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는 어디에도 공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회사를 볼 때는 결과를 보여주는 지표(부문 이익률)와 신뢰를 보여주는 지표(고객 명단), 그리고 자신감을 보여주는 지표(증설 결정) 세 가지를 함께 놓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만 보면 사이클을 체질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이 편은 반도체 소부장 히어로즈 안에서 성격이 다른 자리에 섭니다. 지금까지 다룬 회사들이 ‘아무도 원하지 않던 좁은 자리를 떠맡아 대체 불가능해진’ 강소기업들이었다면, 이 편은 ‘들어가려면 조 단위 돈이 드는 좁은 자리’의 이야기입니다. 같은 소부장이라는 말 안에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종류가 있다는 것 — 그것이 이 편이 시리즈에 더하는 관점입니다. 반도체 뉴스에서 소부장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그 회사가 어느 쪽인지를 먼저 물어보시길 권합니다.
본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실적·점유율·목표주가 등은 각 증권사·시장조사기관의 추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확정된 사실과 전망을 구분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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