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에서는 반도체의 ‘설계도’를 그리는 IP와 팹리스를 살펴봤습니다. 이제 이 설계도는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바로 도면대로 실제 칩을 찍어내는 ‘제조(전공정)’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위탁생산을 전담하는 파운드리와, 웨이퍼·포토·식각·증착 등 정밀 공정 하나하나를 책임지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이 함께 만들어갑니다. 오늘은 이 제조 단계를 원재료부터 순서대로 따라가며, 왜 이 영역이 ‘나노 전쟁’이라 불릴 만큼 치열한지, 그리고 이 시장을 이끄는 대표기업들은 누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파운드리 — 위탁생산이라는 거대한 사업
파운드리(Foundry)는 팹리스가 그려온 설계도대로 실제 칩을 찍어내는 ‘위탁생산 공장’입니다. 2부에서 살펴봤듯, 최신 공정을 갖춘 반도체 공장을 짓는 데는 수십조 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사업을 할 수 있는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습니다.
💡 쉽게 비유하면 옷 공장이 디자이너의 도면을 받아 실제 옷을 만드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다만 반도체 공장은 옷 공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합니다. 먼지 하나, 진동 하나에도 수만 개의 칩이 통째로 불량이 될 수 있어서, 공장 내부는 먼지 농도를 일반 수술실보다도 훨씬 낮게 유지하는 ‘클린룸’으로 지어집니다.
이 공장이 실제로 하는 일의 규모를 가늠해보면 왜 이 사업이 이렇게까지 어려운지 감이 옵니다. 최선단 공정으로 칩 하나를 완성하기까지는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리고, 깎고, 막을 입히는 세부 작업을 무려 수백 번에서 많게는 1,000번 넘게 반복해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치고 웨이퍼 한 장이 공장에 들어가서 완성돼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두세 달, 최선단 공정은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공정 하나하나의 정밀도가 극도로 높다 보니, 중간중간 계측·검사를 거치며 문제가 없는지 계속 확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긴 시간과 수많은 단계 중 단 한 곳에서라도 오차가 생기면 그 웨이퍼 전체가 못 쓰게 될 수 있다는 점이, 파운드리 사업의 진입장벽이 유독 높은 이유입니다.
‘나노 공정’이란 정확히 무슨 뜻일까?
뉴스에서 흔히 보는 ‘3나노 공정’, ‘2나노 공정’ 같은 표현은 반도체 회로의 선폭, 즉 트랜지스터를 얼마나 가늘고 촘촘하게 그릴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트랜지스터는 전기 신호를 켜고 끄는 아주 작은 스위치인데, 이 숫자가 작을수록 같은 면적 안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트랜지스터가 더 많이, 더 촘촘하게 들어갈수록 칩은 더 빠르게 연산하면서도 전력은 덜 소모합니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예전보다 오래가면서도 성능은 계속 좋아지는 이유, 데이터센터가 같은 전기료로 더 많은 AI 연산을 처리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미세공정 발전 덕분입니다. 다만 5나노에서 3나노로, 3나노에서 2나노로 한 단계 낮추는 데 필요한 장비와 기술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이 경쟁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회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트랜지스터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GAA(Gate-All-Around, 게이트올어라운드)라는 신기술도 등장했습니다. 기존 방식보다 전류가 새는 것을 더 잘 막아주는 구조인데,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이 기술을 3나노 공정에 도입하며 승부수를 던졌고, TSMC도 2나노부터 이 방식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파운드리 경쟁은 단순히 ‘누가 더 많이 짓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어려운 물리적 난제를 먼저 풀어내느냐’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제조 단계를 이끄는 대표기업 — 파운드리
🇺🇸 미국 (뉴욕·나스닥)
- TSMC [뉴욕 ADR TSM] 파운드리 시장의 압도적 1위 기업으로, 대만에 본사를 두고 있지만 미국 증시에도 ADR(주식예탁증서) 형태로 상장돼 있습니다. 최선단 공정 점유율이 워낙 높아 엔비디아·애플 같은 대형 팹리스 고객들의 물량을 사실상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고, AI 칩에 필수적인 첨단 패키징 기술(CoWoS)까지 함께 갖추고 있어 경쟁사들이 쉽게 따라잡기 어려운 위치에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집계에 따르면 TSMC의 전 세계 파운드리 매출 점유율은 70%대 초중반에 이르는데, 이는 2위 삼성전자 파운드리(10%대 초반)의 5배가 넘는 격차로, ‘압도적’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숫자로 보여줍니다.
- GlobalFoundries [나스닥 GFS] 최선단 공정 경쟁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자동차·통신 등에 쓰이는 성숙 공정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안정적인 입지를 구축한 미국 파운드리입니다. 원래 AMD의 자체 생산공장이었다가 2009년 별도 회사로 분사됐는데, 분사 이후에도 TSMC·삼성전자만큼 막대한 자본을 미세공정 경쟁에 쏟아붓지 못하면서 2018년 7나노 이하 최선단 공정 개발을 아예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결정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는 평가도 있는데, 최선단 경쟁에서 발을 뺀 대신 자동차·통신처럼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요를 가진 성숙 공정에 역량을 집중해, 소수 대형 고객사의 물량 변동에 실적이 크게 출렁이는 최선단 파운드리들과는 다른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확보했습니다.
🇰🇷 코스피
- 삼성전자 [코스피 005930]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이자, 파운드리 사업에서도 TSMC를 추격하는 세계 2위 기업입니다.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두 수행하는 IDM이면서 동시에 다른 팹리스 고객의 위탁생산도 받는 독특한 위치에 있고, 2나노 GAA 공정을 앞세워 최선단 경쟁에서 승부를 보고 있습니다.
- DB하이텍 [코스피 000990] 국내 유일의 순수 파운드리 전문기업입니다. 최선단 공정 경쟁과는 결이 다른 전략으로, 비교적 성숙한 8인치 웨이퍼 공정에서 전력관리반도체(PMIC)나 디스플레이구동칩(DDI) 같은 아날로그 반도체를 전문적으로 생산합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꾸준한 수요가 있는 틈새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경우입니다.
2. 소부장 — 파운드리를 떠받치는 숨은 주역들
그런데 파운드리는 스스로 모든 공정을 발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전 세계 각지의 전문 장비·소재 회사들로부터 최첨단 장비와 재료를 공급받아 이를 조합해 칩을 만듭니다. 이 장비·소재·부품 회사들을 통틀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라고 부르는데, 파운드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이 소부장 생태계가 받쳐주지 못하면 최신 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실제 칩 하나가 웨이퍼에서부터 완성되기까지, 이 소부장 기업들과 함께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A. 웨이퍼 — 반도체의 ‘도화지’
웨이퍼는 실리콘(규소)을 아주 얇고 둥글게 깎아 만든 원판으로, 이 위에 수백~수천 개의 칩이 그려집니다.
💡 쉽게 비유하면 쿠키 반죽을 넓게 펴놓고 그 위에 여러 개의 쿠키 모양을 찍어내는 것처럼, 웨이퍼는 여러 칩을 한 번에 그려낼 수 있는 ‘큰 반죽판’ 역할을 합니다. 실리콘을 원자 단위로 균일하게 정제하고 결정을 성장시켜야 하기 때문에, 이 시장을 장악한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습니다.
웨이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먼저 모래의 주성분인 이산화규소에서 불순물을 제거해 순도 99.999999999%(‘일레븐 나인’이라 불릴 만큼 극도로 순수한 수준)의 폴리실리콘을 뽑아냅니다. 이 폴리실리콘을 섭씨 1,400도가 넘는 고온에서 녹인 뒤, 씨앗 결정을 담가 아주 천천히 회전시키며 끌어올리면 원기둥 모양의 커다란 실리콘 결정 덩어리(잉곳)가 자라납니다. 이를 ‘초크랄스키(Czochralski) 공법’이라 부르는데, 마치 꿀을 젓가락에 묻혀 천천히 돌리면서 감아올리는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기둥 모양의 잉곳을 아주 얇게 저며 썰고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하면 비로소 우리가 아는 둥근 웨이퍼가 됩니다. 웨이퍼의 지름도 중요한데, 요즘 최선단 공정에서는 지름 300mm(12인치) 웨이퍼가 표준입니다. 예전에 널리 쓰이던 200mm(8인치) 웨이퍼보다 면적이 훨씬 넓어, 같은 공정 횟수로 한 번에 찍어낼 수 있는 칩의 개수가 늘어나 원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DB하이텍 같은 8인치 전문 파운드리가 최선단 경쟁 대신 아날로그 반도체라는 틈새시장에 집중하는 이유도, 이런 웨이퍼 크기의 경제성 차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대표기업
- 신에츠화학·섬코 [일본 상장] 웨이퍼 글로벌 시장에서 1, 2위를 다투는 일본 기업들로, 전 세계 웨이퍼 공급망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 SK실트론 [비상장] 국내 유일의 웨이퍼 생산 기업으로 세계 3위권 실리콘 웨이퍼 제조사입니다. 전력반도체용 SiC(탄화규소) 웨이퍼도 함께 보유하고 있어 미래 성장성도 갖췄지만, 증권시장에는 상장돼 있지 않은 비상장 기업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 원익QnC [코스닥 074600] 웨이퍼를 고정하고 다루는 데 필요한 석영·세라믹 부품을 만드는 기업으로, 미국·일본 기업 인수를 통해 이 분야의 글로벌 경쟁력을 키워왔습니다.
- 하나머티리얼즈 [코스닥 166090] 식각 공정에 쓰이는 실리콘·SiC 부품(전극, 링)을 전문으로 공급하는 기업입니다.
B. 포토(노광) — 회로를 ‘인화’하는 과정
포토 공정은 웨이퍼 위에 회로 패턴을 그려 넣는 과정입니다. 웨이퍼에 빛에 반응하는 물질(감광액)을 바른 뒤, 회로 모양이 새겨진 마스크를 대고 빛을 쏘아 원하는 패턴만 화학반응을 일으키게 만듭니다.
💡 쉽게 비유하면 사진관에서 필름에 빛을 쏘아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다만 반도체의 회로 그림은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분의 1 수준으로 극도로 미세해서, 일반적인 빛이 아니라 파장이 훨씬 짧은 EUV(극자외선)라는 특수한 빛을 씁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EUV 노광장비는 전 세계에서 네덜란드의 ASML만 만들 수 있습니다. 빛의 파장을 극단적으로 짧게 만들어야 하는 기술적 난이도가 워낙 높아, 수십 년간 이 기술을 독점적으로 발전시켜온 ASML을 다른 회사가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장비 한 대 가격이 2,000억~3,000억 원을 넘나들고, 한 해 생산량도 한정돼 있어 ‘슈퍼을’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포토 공정은 실제로는 세 단계로 이뤄집니다. 먼저 웨이퍼 표면에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액체(포토레지스트, 감광액)를 얇고 고르게 바릅니다. 그다음 회로 패턴이 새겨진 마스크(레티클)를 통해 빛을 쏘면, 마스크의 뚫린 부분으로만 빛이 통과해 감광액에 회로 모양대로 화학반응을 일으킵니다(노광). 마지막으로 이 웨이퍼를 특수 용액에 담그면, 빛을 받은 부분과 받지 않은 부분의 용해도 차이 때문에 한쪽만 씻겨 나가면서 웨이퍼 위에 실제 회로 모양이 도드라지게 남습니다(현상). 왜 EUV처럼 파장이 짧은 빛이 필요한지도 물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빛은 파동이라 그 파장보다 작은 크기의 무늬는 선명하게 그릴 수 없는 ‘회절 한계’라는 물리 법칙의 제약을 받습니다. 회로 선폭이 나노미터 단위로 좁아질수록 이 한계를 피하려면 파장이 훨씬 짧은 빛이 필요한데, 기존에 쓰이던 빛(파장 193나노미터)으로는 더 이상 미세한 패턴을 그릴 수 없어, 파장이 13.5나노미터에 불과한 극자외선(EUV)까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대표기업
- ASML [나스닥 ASML] EUV 노광장비를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기업으로, 최선단 공정을 하려는 모든 파운드리·IDM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입니다.
- 피에스케이 [코스닥 319660] 노광 공정 전후로 필요한 감광액 제거·세정(PR Strip) 장비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 기업입니다.
- 파크시스템스 [코스닥 140860] 회로 패턴이 설계대로 잘 새겨졌는지 원자 단위로 측정하는 원자현미경(AFM) 계측 장비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 오로스테크놀로지 [코스닥 322310] 패턴이 정확한 위치에 겹쳐졌는지 확인하는 오버레이 계측 장비를 전문으로 합니다.
C. 식각(에칭) —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는’ 과정
식각은 포토 공정으로 그려진 패턴만 남기고, 나머지 필요 없는 부분을 화학약품이나 가스로 정밀하게 깎아내는 과정입니다.
💡 쉽게 비유하면 조각가가 돌덩어리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깎아내 원하는 형상만 남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웨이퍼 위에는 처음 설계한 회로 모양만 도드라지게 남습니다. 아주 미세한 오차도 불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밀도 경쟁이 특히 치열한 영역입니다.
식각에도 방식이 크게 두 가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쓰여온 습식 식각은 웨이퍼를 화학 용액에 담가 필요 없는 부분을 녹여내는 방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고 저렴하지만 용액이 사방으로 퍼지듯 반응하기 때문에 원하는 방향이 아닌 옆쪽으로도 깎여나가는 단점이 있습니다. 반면 최신 미세공정에서 주로 쓰이는 건식 식각은 반응성 가스를 전기장으로 이온화한 플라즈마 상태로 만들어, 이 이온 입자를 원하는 방향으로만 정확히 내리꽂듯 쏘아 깎아내는 방식입니다. 마치 물줄기를 사방으로 뿌리는 것과, 한 방향으로 정밀하게 쏘는 것의 차이와 비슷합니다. 회로 선폭이 나노미터 단위로 좁아질수록 옆으로 살짝만 더 깎여도 바로 옆 회로와 붙어버리는 불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원하는 방향으로만 수직에 가깝게 깎아내는 ‘방향성’이 건식 식각의 핵심 경쟁력입니다.
대표기업
- Lam Research [나스닥 LRCX] 식각 장비 분야 글로벌 1위 기업으로, AI 반도체 수요 확대의 직접적인 수혜를 받으며 최근 실적과 주가가 크게 성장했습니다.
- 도쿄일렉트론 [일본 상장] 식각·증착·코터/디벨로퍼 등 여러 공정 장비를 폭넓게 다루는 일본의 종합 장비 기업입니다.
- 테스 [코스닥 095610] 가스를 이용한 식각(GPE) 장비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 기업으로, 매출의 상당 부분이 반도체 장비에서 나옵니다.
- 에이피티씨 [코스닥 089970] 디스플레이·반도체용 식각 장비를 함께 다루는 국내 장비 기업입니다.
D. 증착 — 얇은 막을 ‘입히는’ 과정
증착은 웨이퍼 위에 아주 얇은 막(절연막이나 금속막 등)을 씌우는 과정입니다. 포토(그리기) → 식각(깎기) → 증착(막 씌우기), 이 세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최신 반도체는 이를 수십 번에서 많게는 수백 번까지 반복해 회로를 층층이 쌓아 올립니다.
💡 쉽게 비유하면 금속 제품에 도금을 하거나 벽에 페인트를 얇게 칠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인데, 반도체에서는 그 두께가 원자 몇 개 수준으로 극도로 정밀합니다. 마치 고층 빌딩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듯, 이 반복 작업을 통해 평면적인 웨이퍼 위에 입체적인 회로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증착 방식도 막을 입히는 원리에 따라 나뉩니다. 화학기상증착(CVD)은 원료가 되는 가스 여러 개를 웨이퍼 표면으로 흘려보내 그 자리에서 화학 반응을 일으켜 막을 만드는 방식이고, 물리기상증착(PVD)은 금속 같은 원료 덩어리에 강한 에너지를 가해 증발시킨 뒤 웨이퍼 표면에 그대로 얇게 들러붙게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정밀해진 것이 원자층증착(ALD)인데, 가스를 반응시키는 CVD와 원리는 비슷하지만 반응 가스를 한 번에 왕창 흘려보내는 대신, 원자 한 층이 표면 전체를 고르게 덮으면 반응이 저절로 멈추도록(자기제한적 반응) 설계해 원자 단위로 두께를 딱딱 끊어가며 쌓습니다. 회로가 미세해질수록 막의 두께를 원자 수준까지 정밀하게 통제해야 하는 부분이 늘어나기 때문에, 최선단 공정에서는 이 ALD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대표기업
- Applied Materials [나스닥 AMAT] 증착을 포함한 다양한 반도체 장비를 폭넓게 다루는 세계 최대 종합 반도체 장비 기업입니다.
- KLA [나스닥 KLAC] 공정 중간중간 불량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계측 장비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갖고 있습니다.
- 원익IPS [코스닥 240810] 원자층을 한 겹씩 쌓아올리는 ALD(원자층증착) 장비로 삼성전자의 최선단 공정에 장비를 공급하는 국내 대표 증착 장비 기업입니다.
- 주성엔지니어링 [코스닥 036930] ALD 방식의 증착 장비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 대표주로, 최근 중국향 수요 변동에 따라 실적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미세공정 전환의 핵심 수혜주로 꼽힙니다.
- 유진테크 [코스닥 084370] LPCVD(저압화학기상증착) 방식의 증착 장비를 전문으로 하는 국내 기업입니다.
3. ‘나노 전쟁’이 말해주는 것 — 세 가지 해석
파운드리와 소부장, 이 두 축을 함께 놓고 보면 단순한 공정 설명을 넘어서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① ‘나노 전쟁’은 사실 ‘탈락자의 행렬’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최선단 공정을 개발하는 파운드리·IDM은 10곳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공정이 미세해질 때마다 개발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면서, 하나둘 이 경쟁에서 손을 뗐습니다. GlobalFoundries가 2018년 7나노 이하 개발을 포기한 것도, 인텔이 자체 파운드리 사업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지금 최선단 공정을 실제로 양산할 수 있는 곳은 TSMC와 삼성전자, 사실상 둘뿐입니다. ‘나노 전쟁’이라는 표현은 마치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는 그림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경쟁자가 하나씩 탈락해 최후의 두 곳만 남는 ‘생존 게임’에 가깝습니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전 세계 첨단 반도체 제조 능력이 대만과 한국이라는 두 나라, 그중에서도 사실상 두 회사의 손에 집중된다는 뜻이고, 이것이 미국이 자국 내 파운드리 투자를 정책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② 소부장은 ‘누가 이기든 돈 버는’ 유일한 자리다
파운드리 경쟁의 승자가 TSMC든 삼성전자든, 그 승자는 결국 ASML의 EUV 노광장비 없이는 최선단 칩을 찍어낼 수 없고, Lam Research의 식각장비 없이는 회로를 새길 수 없습니다. 즉 소부장, 특히 장비 기업들은 ‘누가 파운드리 전쟁에서 이기느냐’와 무관하게, 그 전쟁 자체가 계속되는 한 꾸준히 수혜를 보는 독특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이 개별 파운드리 기업에 베팅하는 것보다, 이 산업 전체에 무기를 파는 소부장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낮다고 여겨지는 이유입니다. 다만 그만큼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사(특히 ASML처럼 대체 불가능한 기술을 가진 곳)의 협상력도 막강해서, 장비 가격 인상분을 고스란히 파운드리에 전가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둘 만합니다.
③ 한국은 ‘선수’이자 ‘무기상’이라는 이중 포지션에 있다
한국은 이 나노 전쟁에서 흔치 않은 위치에 있습니다. 삼성전자가 TSMC와 최선단 경쟁을 직접 벌이는 ‘선수’인 동시에, 원익QnC·하나머티리얼즈·원익IPS·주성엔지니어링 같은 소부장 기업들은 삼성전자뿐 아니라 TSMC를 포함한 전 세계 파운드리에 장비·소재를 공급하는 ‘무기상’ 역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이중 구조가 갖는 의미는 큽니다. 설령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경쟁에서 TSMC에 밀리더라도, 국내 소부장 생태계는 TSMC向 공급 확대라는 전혀 다른 경로로 수혜를 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삼성전자 파운드리가 흔들리면 한국 반도체 전체가 흔들린다’는 식의 단순화된 서사는 절반만 맞습니다. 제조 단계 안에서도 ‘선수’와 ‘무기상’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의 베팅이 공존하고 있다는 점을, 이 시리즈의 다음 편들에서 개별 기업을 살펴볼 때 함께 기억해두면 좋습니다.
4. 오늘 배운 내용 한눈에 정리
🔑 핵심 정리
① 파운드리는 팹리스의 설계도대로 실제 칩을 찍어내는 위탁생산 공장으로, 최선단 공정은 TSMC·삼성전자 소수만 경쟁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② ‘나노 공정’ 숫자가 작을수록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해 성능은 높이고 전력 소모는 낮출 수 있지만, 그만큼 기술 난이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집니다.
③ 파운드리는 웨이퍼·포토·식각·증착 등 소부장 생태계 없이는 칩을 만들 수 없으며, 특히 ASML의 EUV 노광장비는 사실상 대체 불가능한 독점 기술입니다.
④ 한국은 웨이퍼·식각·증착 소부장 곳곳에 강소기업을 보유하고 있어, AI 반도체 투자 확대의 ‘낙수효과’를 직접 받는 영역으로 꼽힙니다.
4. 다음 편 예고
4부에서는 이렇게 완성된 칩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의 마지막 관문, ‘후공정(패키징·테스트)’을 다룹니다. 특히 이번 AI 반도체 사이클의 핵심으로 떠오른 HBM이 어떻게 ‘패키징’ 기술의 결과물인지, 그리고 이 첨단 패키징 시장을 이끄는 대표기업들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4부 — 후공정(패키징·테스트): HBM 열풍의 핵심인 첨단 패키징 기술의 원리와, 이를 이끄는 대표기업들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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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실적·점유율·목표주가 등은 각 증권사·시장조사기관의 추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확정된 사실과 전망을 구분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