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원전 밸류체인 총정리 ②] 발전(원전·SMR·재생에너지), 사양산업에서 다시 원전의 시간

2026년 7월 기준,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설계인증을 받은 유일한 소형모듈원전(SMR) 상장사 NuScale Power [뉴욕 SMR]의 주가는 2025년 10월 고점 대비 80% 넘게 폭락했습니다. 구속력 있는 상업 계약이 부족하다는 지적과 함께 증권집단소송까지 겹친 결과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1부에서 살펴봤듯 지금은 죽었던 원전마저 마이크로소프트가 되살릴 만큼 원자력 수요가 폭발하는 시기인데, 정작 원전의 미래로 불리는 SMR의 대표주자는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있습니다. 같은 원자력인데, 왜 이렇게 처지가 갈렸을까요. 오늘은 전력·원전 밸류체인 총정리 2부로, ‘발전’ 단계의 핵심인 원전·SMR·재생에너지 삼각구도를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1. 원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

1부에서 우리는 데이터센터가 ‘펌 파워(firm power)’, 즉 날씨와 무관하게 24시간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전력을 요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원전이 이 요구에 가장 정확히 들어맞는 전원입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원전이 전기를 만드는 원리 자체는 간단합니다. 우라늄 핵분열 때 나오는 열로 물을 끓이고, 그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만듭니다. 태양광·풍력이 햇빛·바람이라는 ‘자연이 주는 원료’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원전은 연료봉 안의 핵분열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날씨와 무관하게 일정한 출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부분을 조금 더 들여다보겠습니다. 원자로 안의 우라늄-235 원자핵에 중성자 하나가 부딪히면, 그 원자핵이 둘로 쪼개지면서 엄청난 열과 함께 새로운 중성자 2~3개를 추가로 내놓습니다. 이 새로 나온 중성자가 다시 주변의 다른 우라늄 원자핵에 부딪혀 쪼개지기를 반복하면서, 반응이 저절로 계속 이어지는 ‘연쇄반응’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이 반응이 너무 빠르게 불어나면 위험해진다는 점인데, 이를 통제하는 장치가 바로 중성자를 흡수하는 소재로 만든 ‘제어봉’입니다. 제어봉을 원자로 안으로 더 깊이 넣으면 중성자를 더 많이 흡수해 연쇄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반대로 빼내면 반응이 빨라지면서 출력이 올라갑니다. 이 제어봉의 위치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발전량을 정밀하게 맞출 수 있고, 비상 상황에서는 제어봉을 순식간에 원자로 깊숙이 밀어 넣어(SCRAM이라 부르는 긴급정지) 반응을 즉시 멈출 수도 있습니다. 태양광·풍력은 이런 ‘수도꼭지’가 아예 없어 날씨가 주는 대로 받아야 하지만, 원전은 이 제어봉 하나로 출력을 사람이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기술입니다.

첫째, 원전은 설비이용률이 90%를 넘습니다. 발전소가 가동 가능한 시간의 90% 이상을 실제로 전기를 만드는 데 쓴다는 뜻으로, 태양광(25~35%)이나 풍력(35~40%)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안정성입니다. 둘째, 발전 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지 않아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탄소중립 목표와 맞아떨어집니다. 셋째, 연료비 비중이 발전 단가의 5~7% 수준으로 매우 낮아, 국제 유가나 가스 가격이 출렁여도 전기요금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입니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데이터센터가 단 하루만 멈춰도 손실이 800만 달러를 넘을 수 있다고 추정합니다. 원전은 한번 가동에 들어가면 18~24개월을 연속으로 돌릴 수 있고, 정비를 위해 멈추는 시점도 미리 계획할 수 있어 이런 데이터센터의 눈높이에 맞는 몇 안 되는 전원입니다. 불과 2021년까지만 해도 ‘사양산업’으로 불리던 원전이 이렇게 반전된 배경입니다.

💡 쉽게 비유하면  태양광·풍력이 ‘날씨 좋은 날에만 나오는 프리랜서’라면, 원전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정시 출근하는 정규직’입니다. 데이터센터처럼 1초도 멈추면 안 되는 시설 입장에서는, 조금 비싸더라도 확실하게 출근하는 정규직이 필요합니다. 최근 원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결국 이 ‘확실함’에 대한 값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2. 원자로에 넣을 것 — 우라늄 연료라는 또 하나의 관문

원전 이야기를 할 때 대부분의 관심은 원자로에 쏠립니다. 그런데 원자로를 다 지어놓아도 그 안에 넣을 연료가 없으면 단 1초도 전기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연료를 손에 넣는 과정은, 원자로를 짓는 것 못지않게 길고 까다로운 별도의 산업입니다. 1부의 밸류체인 지도에서 발전 단계에 ‘그리고 그 연료’라고 덧붙여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땅에서 캔 우라늄이 연료봉이 되기까지

원전 연료는 다섯 단계를 거칩니다. 광산에서 우라늄 광석을 캐내고(채굴), 불순물을 걸러 노란 가루 형태의 정광으로 만들고(정련), 이를 기체로 바꾸고(변환), 농도를 높인 뒤(농축), 마지막으로 손가락만 한 알갱이로 굳혀 금속관에 채워 넣습니다(성형가공). 이 관을 여러 개 묶은 것이 원자로에 들어가는 연료봉 다발입니다.

이 다섯 단계 가운데 압도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압도적으로 소수만 할 수 있는 것이 네 번째인 농축입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농축, 무게 차이 하나로 원자를 골라내는 일 땅에서 캐낸 천연 우라늄에는 두 종류의 우라늄이 섞여 있습니다. 핵분열을 잘 일으키는 우라늄-235와, 그렇지 않은 우라늄-238입니다. 문제는 쓸 수 있는 235의 비율이 0.7%밖에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머지 99.3%는 그대로는 쓸모가 없습니다. 일반적인 원전이 돌아가려면 이 비율을 3~5%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는데, 이 작업이 바로 농축입니다. 어떻게 골라낼까요. 두 우라늄은 화학적 성질이 사실상 같아서 화학 반응으로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남은 차이는 딱 하나, 무게입니다. 235가 238보다 아주 조금 가볍습니다. 그래서 우라늄을 기체로 바꾼 뒤 원심분리기에 넣고 초고속으로 돌립니다. 세탁기 탈수처럼 무거운 쪽이 바깥으로 밀려나고 가벼운 쪽이 안쪽에 남는 원리인데, 무게 차이가 1%도 안 될 만큼 미세해서 한 번 돌려서는 거의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심분리기 수백~수천 대를 사슬처럼 이어 붙여(캐스케이드) 조금씩 농도를 올려갑니다. 이 작업량을 재는 단위가 SWU(분리작업단위)입니다. 농축 서비스를 사고팔 때 우라늄 무게가 아니라 SWU로 거래하는 이유는, 값을 결정하는 것이 우라늄의 양이 아니라 ‘분리하는 데 든 일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민감한 문제가 하나 붙습니다. 같은 설비로 농도를 계속 올리면 결국 핵무기용 고농축 우라늄에 도달합니다. 농축 기술이 순수한 산업 기술이 아니라 국제 정치의 통제 대상인 이유이고, 아무 나라나 농축시설을 지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장은 몇 나라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채굴 단계는 그나마 분산돼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이 세계 최대 생산국이고 캐나다·호주가 뒤를 잇습니다. 그런데 농축으로 넘어가면 그림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러시아는 우라늄 채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 안팎에 불과한데도, 농축 단계에서는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2024년 미국이 쓴 농축 서비스의 27%가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원자력 강국인 미국조차 연료의 상당 부분을 러시아에 기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은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 수입을 원칙적으로 금지했지만, 대체 공급원이 없는 경우에는 2028년 1월 1일까지 예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고 싶지 않지만 살 데가 없어서 시한을 둔’ 상태인 셈인데, 이 한 문장이 이 시장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원자로는 여러 나라가 만들 수 있지만, 그 안에 넣을 연료는 그렇지 않습니다.

🌏 해외 — 우라늄 연료 공급망을 쥔 곳

  • Cameco [뉴욕 CCJ]  캐나다 기업으로 세계 최대급 우라늄 생산사입니다. 채굴부터 정련·변환까지 앞단을 폭넓게 다루며, 원전 수요가 늘어날 때 가장 먼저 반응하는 이름 중 하나입니다.
  • Urenco [영국·독일·네덜란드 정부 및 기업 공동 소유 비상장사]  유럽 3국이 함께 세운 농축 전문 기업으로, 미국 뉴멕시코에도 농축시설을 운영합니다. 다만 이 시설의 연간 능력은 미국 전체 농축 수요의 3분의 1 수준에 그칩니다.
  • 센트러스에너지 [뉴욕 LEU]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로부터 우라늄을 20%까지 농축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미국 유일 기업입니다. 오하이오주 파이크턴에서 HALEU 시범 생산을 하고 있으며, 2025년 8월에는 한국수력원자력·포스코인터내셔널과 이 시설을 확장하는 협력 협약을 맺었습니다.

SMR이 마주한 또 하나의 벽 — HALEU

연료 이야기가 SMR과 직접 맞닿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기존 대형 원전은 3~5% 농도의 저농축 우라늄을 쓰지만, 지금 개발 중인 차세대 소형 원자로 상당수는 그보다 농도가 높은 연료를 요구합니다. 5~20% 구간의 이 연료를 HALEU(고순도 저농축 우라늄)라고 부르는데, 미국 에너지부가 선정한 차세대 원자로 10기 가운데 9기가 이 연료를 쓰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문제는 이 연료를 만들 수 있는 곳이 사실상 러시아와, 이제 막 시범 생산에 들어간 센트러스에너지뿐이라는 점입니다. 센트러스의 시범 설비는 원심분리기 16대로 연간 900kg을 만드는 수준인데, 이는 시험로 몇 기를 돌릴 정도이지 상업용 SMR을 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회사는 원심분리기를 120대 규모로 늘려 연 6,000kg 체제를 갖추고 2029년 상업 생산에 들어가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는데,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목표입니다.

이 사실은 3절에서 다룰 SMR 논쟁을 읽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SMR이 내세우는 최대 무기가 ‘빨리 지을 수 있다’는 속도인데, 원자로를 3년 만에 지어놓아도 그 안에 넣을 연료가 준비되지 않으면 가동은 시작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한국은 이 관문 앞에서 어떤 상태인가

한국은 원자로를 만들어 수출하는 나라이면서도, 그 원자로에 넣을 우라늄은 한 톨도 스스로 농축하지 못합니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미원자력협정상 국내에 농축시설을 두는 것이 제한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축된 우라늄을 해외에서 사 온 뒤, 마지막 단계인 성형가공만 국내에서 합니다. 이 일을 맡는 곳이 한국수력원자력 계열의 한전원자력연료 [한국수력원자력 계열 비상장사]입니다.

1부의 한국 지도표에서 우라늄 연료 칸만 유독 비어 있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주기기도 만들고 설계도 하고 정비도 하는데, 정작 그 안에 넣을 연료는 전량 남에게 기대고 있습니다. 한수원과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미국 농축시설 확장에 참여하려는 것도 이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로 읽힙니다. 다만 협약은 협약일 뿐, 실제 물량 확보로 이어지는지는 앞으로 확인해야 할 항목입니다.

3. SMR이란 무엇이고 왜 이렇게 논쟁적인가

SMR(Small Modular Reactor, 소형모듈원전)은 300MW 이하의 소형 원자로를 공장에서 표준화된 모듈로 미리 제작한 뒤,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방식의 원전입니다. 기존 대형 원전이 건축 현장에서 모든 걸 처음부터 짓는 ‘맞춤 주택’이라면, SMR은 공장에서 미리 찍어낸 부품을 현장에서 조립하는 ‘조립식 주택’에 가깝습니다. 이론적인 장점은 뚜렷합니다. 건설 기간이 3~5년으로 대형 원전(15년 안팎)보다 훨씬 짧고, 초기 투자 부담이 작으며, 필요한 만큼 모듈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확장할 수 있습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SMR  SMR은 원자로 하나의 크기를 줄이는 대신, 여러 개를 공장에서 표준화해 대량으로 찍어내 비용을 낮추겠다는 아이디어입니다. 레고 블록처럼 표준화된 조각을 필요한 만큼 조립해 원하는 크기의 발전소를 만드는 셈입니다. 2022년 기준 전 세계에서 80여 종의 SMR 모델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SMR이 ‘건설 기간이 짧다’는 점 못지않게 내세우는 무기가 바로 ‘피동형 안전계통’입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근본 원인은 지진과 쓰나미로 외부 전원과 비상 발전기가 모두 끊기면서, 원자로를 식혀줄 냉각수 펌프를 돌릴 전기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원전 업계의 화두는 ‘전기가 끊겨도 저절로 식는 원자로’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답이 바로 피동형 안전계통입니다. 별도의 펌프나 전기 없이도, 뜨거운 물은 위로 올라가고 찬물은 아래로 가라앉는 자연대류나 중력처럼 물리 법칙 그 자체의 힘만으로 냉각수가 순환하도록 설계하는 방식입니다. SMR은 원자로 크기가 작아 열을 식혀야 할 절대량 자체가 적기 때문에, 이런 피동형 냉각 방식을 대형 원전보다 훨씬 구현하기 쉽습니다. 즉 SMR의 진짜 핵심 경쟁력은 단순히 ‘작다’는 크기가 아니라, 사람의 개입이나 외부 전원 없이도 스스로 안전해지는 이 설계 철학에 있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디어가 아직 숫자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회의론의 핵심은 경제성입니다. 원자로를 아무리 작게 만들어도 격납건물, 제어실, 보안설비, 인허가 절차 같은 ‘고정비’는 원자로 크기에 비례해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기 SMR의 kW당 건설비는 오히려 6,000~8,000달러 수준으로, 대형 원전보다 비쌀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 회의론을 상징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NuScale이 추진했던 ‘탄소free발전 프로젝트(Carbon Free Power Project)’는 처음 예상했던 건설비가 53억 달러에서 92억 달러로 폭증한 끝에 결국 2023년 취소됐습니다. 이 사건 이후 SMR의 경제성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고, 이는 오늘 인트로에서 언급한 NuScale 주가 급락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발전원별 균등화발전비용(LCOE, 발전소의 전 생애 비용을 총발전량으로 나눈 단가)을 비교하면 이 논쟁의 배경이 좀 더 선명해집니다.

표를 좌우로 밀어서 보실 수 있습니다.

발전원 LCOE(균등화발전비용, $/MWh) 설비이용률
신규 원전(대형) 약 141~221달러 90% 이상
SMR(추정) 약 89~120달러 이상(2030년 목표치 포함) 90% 이상(목표)
유틸리티 태양광 약 38~78달러 25~35%
육상풍력 약 37~86달러 35~40%

⚠️ LCOE 수치를 볼 때 주의할 점  위 표의 LCOE는 여러 기관(Lazard, NREL, Wood Mackenzie 등)의 추정치를 종합한 범위이며, 실제 개별 프로젝트의 비용은 이보다 훨씬 낮거나 높을 수 있습니다. 또한 LCOE는 계통 연결이나 저장 비용을 포함하지 않는 단순 비교 지표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SMR의 경우 아직 상용 가동 사례가 충분치 않아, 표에 제시된 수치 자체가 ‘전망’에 가깝다는 점을 감안해야 합니다.

다만 낙관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조건부 구매계약(offtake) 파이프라인은 국제에너지기구(IEA) 집계 기준 2024년 말 25GW에서 2025년 45GW로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아마존은 X-energy [미국 비상장]에 투자하며 SMR 4기 건설을 추진 중이고, 구글은 카이로스 파워 [미국 비상장]와 2030년 첫 가동을 목표로 500MW 규모의 전력구매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술에 베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원전 공급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4. 한국형 원전, 다시 세계로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은 이미 실물로 증명된 트랙레코드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형 원전 기술(APR1400 계열)은 2009년 UAE 바라카 원전 수주(4기, 5.6GW) 이후, 이번엔 출력을 낮춘 파생 모델 APR1000으로 두 번째 대형 해외 수출에 성공했습니다. APR1400·APR1000은 모두 ‘가압경수로(PWR)’ 계열입니다. 원자로 안의 물을 아주 높은 압력으로 눌러 섭씨 300도가 넘어도 끓지 않게 만든 뒤, 이 뜨거운 물(1차 계통)이 별도의 물(2차 계통)을 데워 그 증기로 터빈을 돌리는 방식으로, 원자로를 식히는 물과 실제 터빈을 돌리는 증기가 서로 섞이지 않도록 분리한 구조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동 중인 원전의 3분의 2 이상이 이 방식을 쓸 만큼 검증된 표준 기술이며, 안전성 등급으로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강화된 기준을 반영한 3세대 이후(Gen III+) 모델로 분류됩니다.

대형 원전 하나가 완공되기까지, 국내 기업들은 릴레이하듯 역할을 나눠 맡습니다. 원자로·증기발생기 등 핵심 기기를 제작하는 두산에너빌리티 [코스피 034020], 전체 설계를 총괄하는 한전기술 [코스피 052690], 완공 후 정비를 전담하는 한전KPS [코스피 051600], 보조기기(BOP)를 공급하는 비에이치아이 [코스닥 083650] 순으로 이어지는 이 생태계는, 다음에 이어질 원전 히어로즈 시리즈에서 하나씩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 국내 — 원전을 짓고 정비하는 코스피 3사

  • 두산에너빌리티 [코스피 034020]  원자로와 증기발생기 같은 원전 핵심 기기(주기기)를 만드는 국내 유일 기업입니다. 두코바니 5·6호기 주기기 계약(약 4조 900억원)과 터빈발전기 공급계약(약 7,111억원)을 각각 따냈고, 3부에서 볼 가스터빈 국산화도 이 회사가 맡고 있습니다.
  • 한전기술 [코스피 052690]  원전의 종합설계를 담당합니다. 원자로 계통부터 발전소 전체 배치까지를 도면으로 그려내는 역할로, APR1400·APR1000 설계의 실무를 맡아온 곳입니다.
  • 한전KPS [코스피 051600]  완공된 원전의 정비를 전담합니다. 원전은 18~24개월마다 계획정비를 받는데, 이 반복 수요가 건설 경기와 무관하게 꾸준한 매출을 만들어준다는 점이 이 회사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 국내 — 보조기기를 맡는 코스닥 기업

  • 비에이치아이 [코스닥 083650]  원전 보조기기(BOP)를 공급합니다. 주기기가 아닌 급수가열기·복수기 같은 설비를 만드는데, 신한울 3·4호기에 반복 수주하며 국내 원전 생태계의 한 축을 맡고 있습니다. 가스복합화력의 핵심 설비인 배열회수보일러(HRSG)도 이 회사의 주력입니다.

🌏 해외 — 운영하는 쪽, 그리고 기술의 원류

  • Constellation Energy [나스닥 CEG]  미국 최대 원전 운영사입니다. 1부 인트로에 나온 크레인 클린 에너지 센터를 마이크로소프트와 계약한 당사자로, 원전을 ‘짓는’ 쪽이 아니라 ‘돌리며 파는’ 쪽의 대표 사례입니다.
  • 웨스팅하우스 [미국 비상장]  가압경수로 기술의 원류에 해당하는 미국 기업입니다. 한국형 원전이 이 회사의 기술 계보 위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이, 뒤에서 볼 지식재산권 합의의 배경입니다.

이 생태계의 각 회사는 앞으로 이어질 원전 히어로즈 시리즈에서 하나씩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봐두실 것은 역할이 완전히 나뉘어 있다는 점입니다 — 설계하는 곳, 만드는 곳, 정비하는 곳이 각각 다른 회사이고, 그래서 원전 수주 한 건이 여러 회사의 실적에 시차를 두고 나눠 반영됩니다. 수주 발표가 났다고 모든 관련 기업의 실적이 동시에 좋아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체코 두코바니 수주 타임라인

  • 2024년 7월: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전력 계열 비상장사], 체코 두코바니 원전 2기(대형 원전을 줄인 APR1000 모델)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 프랑스 EDF [프랑스 비상장]를 제치고 확정
  • 2025년 1월: 오랜 지식재산권 분쟁을 벌여온 웨스팅하우스 [미국 비상장]와 한수원·한국전력이 글로벌 합의에 도달. 다만 이 합의로 한수원은 앞으로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웨스팅하우스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북미·EU(체코 제외)·영국·일본 등 일부 지역의 신규 입찰 참여가 제한됨
  • 2025년 6월: 체코 정부와 본계약 체결, 계약 규모는 약 26조원으로 추산. EDF의 마지막 법적 이의제기도 기각됨
  • 2025년 12월: 두산에너빌리티가 두코바니 5·6호기의 원자로·증기발생기 등 핵심 기기(NSSS) 계약(약 4.09조원)과 터빈발전기 공급계약(약 7,111억원)을 각각 체결. 같은 달 EU 집행위원회는 체코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 계획에 대한 심층조사에 착수
  • 2026년 1월: 한수원이 SK이노베이션 [코스피 096770]으로부터 미국 SMR 개발사 TerraPower [미국 비상장]의 지분을 4,000만 달러에 인수 — 한국 공기업이 처음으로 SMR 개발사에 직접 투자한 사례

한수원의 원전 수출 매출은 2025년 약 28억 달러(주로 UAE 관련)에서 2030년 150억 달러까지 늘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회사 측 목표치입니다. 다만 이런 낙관적 시나리오와 별개로, 폴란드 원전 프로젝트에서는 한수원이 철수했다는 보도도 있어, 모든 수출 시도가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한국형 SMR, i-SMR

한국은 자체 SMR 모델인 i-SMR(170MW급)도 개발하고 있습니다. 붕산 없이 운전이 가능하고, 사고 발생 확률을 대형 원전 대비 1,000배 이상 낮췄다고 알려진 완전 피동형 안전계통이 특징입니다. 2023년부터 2028년까지 총 3,992억원이 투입되며, 2026년 2월 원자력안전위원회에 표준설계인가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계획대로라면 2028년 말 인가를 받아 2031년 첫 모듈을 제작하고, 2030년대 초반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는 계획일 뿐이며, 실제 인가·상용화 시점은 이 산업 전체의 특성상 지연될 가능성을 열어두고 지켜봐야 합니다.

5. 재생에너지와 원전, 적인가 동지인가

여기까지 읽으면 원전이 재생에너지를 밀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보완 관계에 가깝습니다. 원전은 24시간 안정적인 기저부하를, 재생에너지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한계비용의 전력을 제공하되 그 간헐성은 4부에서 다룰 ESS나 가스발전으로 메우는 구조입니다. IEA에 따르면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원 구성은 가스 40% 이상,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약 24%, 원전 약 20%, 석탄 약 15%로 여러 전원이 섞여 있습니다.

다만 정책 자금이라는 관점에서는 둘 사이에 경쟁 요소도 존재합니다. 일부 환경단체는 한정된 투자 재원이 태양광·풍력에서 원전 쪽으로 옮겨가는 것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책 방향도 이 지점에서 유동적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5년 9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대규모 신규 원전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며 재생에너지 확대 방침을 밝혔는데, 이는 기존 원전의 활용과 수명연장은 유지하되 신규 대형 원전 확대에는 신중한 입장을 시사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38년까지 신규 원전 2기와 SMR 0.7GW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계획이 그대로 실행될지는 지켜봐야 할 변수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둘 것은 재생에너지가 늘어날수록 오히려 급전 가능한 전원이 더 필요해진다는 역설입니다. 1부에서 본 대로 전기는 저장할 수 없어 만드는 양과 쓰는 양을 실시간으로 맞춰야 하는데, 태양광·풍력은 사람이 그 양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은 전력망일수록 그 출렁임을 받아낼 원전·가스발전이나 4부에서 다룰 ESS를 함께 갖춰야 합니다. ‘재생에너지냐 원전이냐’라는 구도가 성립하기 어려운 물리적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실제 숫자도 이 점을 보여줍니다. 앞서 본 미국 데이터센터의 전력원 구성에서 재생에너지가 24%인데도 가스가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재생에너지를 쓰기 위해서라도 언제든 켤 수 있는 전원을 함께 붙여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원전이 다시 주목받는 흐름과 재생에너지가 계속 늘어나는 흐름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필요로 하는 구조입니다.

6. 그늘도 있다 — 균형 잡힌 시각

원전이 다시 주목받는 흐름은 분명하지만, 이 흐름을 볼 때 함께 봐둬야 할 반대편이 있습니다.

첫째, 원전은 여전히 가장 느린 선택지입니다. 대형 원전 하나를 짓는 데 15년 안팎이 걸리고, 그 사이에 정권이 두세 번 바뀝니다. 지금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전기는 2~3년 안에 필요한 전기인데, 원전은 그 수요에 직접 답할 수 없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들이 원전과 계약하면서도 동시에 가스발전과 재생에너지를 함께 확보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원전 관련 뉴스를 볼 때 ‘언제부터 전기가 나오는가’를 함께 확인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둘째, 사용후핵연료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원전은 발전 과정에서 탄소를 내지 않지만, 대신 수만 년간 관리해야 하는 방사성 폐기물을 남깁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고준위 방폐물 영구처분장을 완전히 가동하고 있지 못하며, 한국은 부지 선정 단계에서도 오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 비용과 부담은 지금의 발전 단가 계산에 충분히 반영돼 있지 않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옵니다.

셋째, 사고 한 번의 무게가 다른 산업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은 원전을 전면 폐쇄했고, 일본은 대부분의 원전을 수년간 멈춰 세웠습니다. 기술적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한 번의 사고가 산업 전체의 방향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어떤 발전원에도 없는 이 산업 고유의 리스크입니다.

넷째, 정책 변동성이 특히 큽니다. 한국만 해도 탈원전과 원전 확대 사이를 정권마다 오갔고, 신규 대형 원전에 대한 현 정부의 입장도 앞서 본 대로 신중한 쪽에 가깝습니다. 원전 관련 기업의 실적은 기술력만큼이나 어느 나라가 언제 몇 기를 짓기로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이 결정은 기업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 숫자를 볼 때 주의할 점 이 편에서 확정된 사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체코 두코바니 본계약 체결(2025년 6월, 약 26조원)과 두산에너빌리티의 주기기·터빈발전기 계약,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합의(2025년 1월), 한수원의 TerraPower 지분 인수(2026년 1월, 4,000만 달러), NuScale의 탄소free발전 프로젝트 취소(2023년), 원전 설비이용률 90% 이상이라는 운영 실적. 반면 다음은 목표이거나 추정입니다 — 한수원의 2030년 원전 수출 매출 150억 달러 목표, i-SMR의 2028년 인가·2030년대 초반 상용화 계획, 센트러스에너지의 2029년 HALEU 상업 생산 계획, 표에 실린 LCOE 수치 전체, 그리고 SMR 조건부 구매계약 파이프라인 수치. LCOE라는 지표 자체의 한계는 3절 표 아래 박스에 따로 정리해두었으니 함께 참고하시면 됩니다. 원전과 SMR을 나란히 볼 때는 특히 ‘지금 확정된 값’과 ‘2030년을 목표로 한 값’이 한 표 안에 섞여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7. 이 삼각구도가 말해주는 것 — 다섯 가지 해석

원전·SMR·재생에너지라는 세 조각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단순히 ‘원전이 다시 뜬다’는 헤드라인 너머로 몇 가지 날카로운 시사점이 보입니다.

① SMR의 진짜 무기는 ‘작다’는 크기가 아니라 ‘안전하다’는 설계 철학입니다

SMR을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 ‘kW당 건설비가 대형 원전보다 비쌀 수 있다’는 경제성 문제에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쟁이 SMR의 진짜 가치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앞서 살펴봤듯 SMR의 핵심은 전기가 끊겨도 중력과 자연대류만으로 스스로 식는 피동형 안전계통이고, 이는 후쿠시마 사고가 남긴 ‘전원 상실이 곧 사고로 이어진다’는 교훈에 대한 업계의 정면 대응입니다. LCOE라는 가격표 하나로 SMR의 성패를 판단하는 것은, 마치 자동차의 가치를 연비 하나로만 매기며 에어백의 가치는 계산에서 빼는 것과 비슷합니다. 안전성이라는 가치는 지금 당장 가격에 잡히지 않지만, 규제 승인 속도와 대중 수용성이라는 형태로 결국 경제성에 반영됩니다.

② NuScale의 몰락과 SMR의 몰락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NuScale의 주가 폭락은 ‘SMR 자체가 사기’라는 인상을 주기 쉽지만, 정확히는 ‘NuScale이라는 첫 주자가 첫 대형 프로젝트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같은 시기 아마존은 X-energy에 투자해 SMR 4기 건설을 추진하고 있고, 구글은 카이로스 파워와 500MW 규모 전력구매계약을 새로 맺었습니다. 조건부 구매계약 파이프라인이 1년 만에 25GW에서 45GW로 늘어난 것도 이 흐름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하이퍼스케일러들은 NuScale이라는 한 회사가 아니라, SMR이라는 기술 카테고리 자체에 분산해서 베팅하고 있습니다. 신생 기술 산업의 초기에는 항상 첫 주자가 가장 먼저 시장의 의심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법이고, 그 첫 주자의 실패가 산업 전체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태양광·전기차 산업의 초기 역사에서도 이미 여러 번 확인된 패턴입니다.

③ 한국의 원전 수출은 축복이자 동시에 족쇄입니다

체코 수주 26조원이라는 숫자만 보면 완전한 승리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웨스팅하우스와의 IP 합의라는 대가가 숨어 있습니다. 앞으로 원전을 수출할 때마다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고, 북미·EU(체코 제외)·영국·일본 시장에는 당분간 입찰 자체가 제한됩니다. 이는 한국 원전 기술이 미국 기술 계보 위에서 성장했다는 태생적 한계가 드러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합의가 ‘패배’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오랜 소송전의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남은 시장(체코를 포함한 유럽 상당수, 중동, 아시아 등)에서는 확실하게 사업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자유보다 확실한 일부를 택한 셈인데, 이 선택이 장기적으로 남는 장사였는지는 앞으로 한수원이 제한되지 않은 시장에서 얼마나 더 많은 수주를 따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④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진짜 관계는 ‘경쟁’이 아니라 ‘시간차’입니다

정책 자금을 둘러싼 논쟁 때문에 원전과 재생에너지가 서로 자리를 다투는 경쟁자처럼 그려지지만, 건설 기간이라는 축으로 보면 이 둘은 사실 다른 시간대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에 더 가깝습니다. 태양광·풍력은 1~2년 안에 지을 수 있어 ‘지금 당장’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원전은 15년 가까이 걸리는 대신 한번 지으면 60년 넘게 안정적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데이터센터들이 급한 대로 재생에너지·가스발전으로 버티면서 동시에 10년, 20년 뒤를 내다보고 원전에 투자하는 것도 이 시간차 때문입니다. 즉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라는 양자택일의 질문보다, ‘지금 당장의 병목은 무엇으로 메우고, 10년 뒤의 기저 전력은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시간표 관점의 질문이 이 산업을 훨씬 정확하게 설명해줍니다.

⑤ SMR이 파는 것은 전기가 아니라 속도입니다

1부에서 이 산업의 계층마다 시계가 다르고,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비싸진다는 관점을 잡아뒀습니다. 이 관점으로 보면 SMR의 정체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SMR은 더 싼 전기를 팔겠다는 상품이 아닙니다 — 앞서 본 대로 kW당 건설비는 오히려 대형 원전보다 비쌀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SMR이 파는 것은 시간입니다. 15년 걸리던 것을 3~5년으로 줄이겠다는 약속이 이 기술의 본체입니다.

그래서 SMR의 성패를 가를 시험대도 경제성이 아니라 시간입니다. 만약 정말 3년 만에 지어 돌릴 수 있다면, 건설비가 조금 비싸도 그 속도 자체가 값을 정당화합니다. 지금 당장 전기가 필요한 데이터센터에게 12년을 앞당겨주는 것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속도를 증명하지 못하면 SMR은 ‘비싸기까지 한 원전’이 됩니다. NuScale의 프로젝트가 건설비 폭증 끝에 취소된 것이 시장에 그토록 큰 충격을 준 이유도, 비용 문제 자체보다 ‘약속한 속도를 지키지 못했다’는 신호로 읽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절에서 본 연료 문제가 여기에 겹칩니다. 원자로를 3년 만에 지어도 HALEU를 구하지 못하면 가동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이 연료를 만들 수 있는 상업 설비는 시범 수준이고, 회사가 제시한 상업 생산 목표는 2029년입니다. 즉 SMR이 넘어야 할 가장 느린 관문은 원자로가 아니라 연료 공급망일 수 있습니다. 앞으로 SMR 관련 소식을 보실 때 원자로 인허가 진척만큼이나 연료 확보 계약을 함께 확인하시길 권하는 이유입니다.

8. 오늘 배운 내용 한눈에 정리

🔑 핵심 정리

① 원전은 90% 이상의 설비이용률로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펌 파워’ 조건에 가장 부합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② SMR은 짧은 건설기간이라는 이론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NuScale CFPP 취소·주가 급락 사례가 보여주듯 아직 경제성이 숫자로 증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③ 한국은 체코 두코바니 수주(약 26조원)로 UAE에 이은 두 번째 대형 원전 수출에 성공했지만, 웨스팅하우스와의 IP 합의로 일부 시장에서는 입찰이 제한됩니다.

④ 원전과 재생에너지는 기술적으로는 보완재이지만, 정책 자금 배분을 둘러싼 경쟁 관계도 함께 존재하며 한국의 정책 방향은 아직 유동적입니다.

⑤ 원자로를 지어도 넣을 연료가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농축은 소수 국가만 할 수 있는 관문이고, 한국은 한미원자력협정상 국내 농축시설을 둘 수 없어 전량 수입에 의존합니다.

⑥ SMR이 파는 것은 싼 전기가 아니라 속도입니다. 그 속도를 실물로 증명하기 전까지는 값이 매겨지기 어렵고, HALEU 공급망이 그 속도의 발목을 잡을 수 있습니다.

9. 마무리하며

원전은 지금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지어진 대형 원전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지만, 아직 지어지지 않은 SMR은 ‘과연 숫자가 맞을까’라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습니다. 이 두 얼굴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원전 관련 투자 콘텐츠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태도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발전소에서 만든 이 전기를 실제로 실어 나르는 단계, 송배전과 전력기기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변압기 하나를 받는 데 왜 4년이나 걸리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부에서 잡아둔 ‘가장 느린 것이 가장 비싸진다’는 관점으로 보면 이 두 얼굴의 정체도 분명해집니다. 이미 지어진 원전은 다시 짓는 데 15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됐고, SMR은 그 15년을 3년으로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아직 그 약속을 실물로 지킨 곳이 없습니다. 같은 원자력인데 하나는 값이 치솟고 하나는 의심받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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