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2일, 미국 플로리다 마러라고.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 해군의 새로운 프리깃함 건조 계획을 발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회사인 한화는 위대한 회사입니다.” 자국 해군 함정 건조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미국 대통령이 외국 기업의 이름을 콕 집어 ‘위대한 회사’라 부른 겁니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해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 중 1,50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213조원을 조선업 협력에 배정했습니다. 세계 2위 원전 강국 프랑스를 꺾고 체코에서 15년 만의 원전 수출을 따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먼저 한국에 손을 내민 것입니다. 반도체 다음이 전력·원전이었다면, 이제 그다음은 조선·방산입니다. 오늘부터 4부에 걸쳐, 왜 지금 전 세계가 한국의 배와 무기에 주목하는지, 213조원 MASGA 프로젝트로 시작된 조선방산 밸류체인 지도를 총정리해보겠습니다.
1. 왜 지금 조선·방산인가 — 석 장의 카드
전력·원전 밸류체인 시리즈에서 우리는 AI가 만들어낸 ‘전기 부족’이라는 새로운 병목을 다뤘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기, 전혀 다른 두 산업이 동시에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배를 만드는 조선업과, 무기를 만드는 방산업입니다. 얼핏 AI와 무관해 보이는 이 두 산업이 왜 지금 뜨거워졌는지, 석 장의 카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카드 ① — 미국의 러브콜, MASGA
미국은 한때 세계 최고의 조선 강국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 상선 발주량의 0.1%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반면 미 해군은 노후 함정 교체와 신형 잠수함 증산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데, 정작 자국 조선소의 생산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미국이 눈을 돌린 곳이 한국입니다. 2025년 7월,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를 약속했고, 이 중 1,500억 달러(약 213조원)를 조선업 협력에 배정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줄여서 MASGA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2026년 4월에는 워싱턴 D.C.에 한미 조선협력센터(KUSPC)가 문을 열었고, 양국은 4개 분야 15건의 업무협약을 체결했습니다.
💡 쉽게 비유하면 — 목수가 부족한 이웃집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집을 짓고 싶은데 정작 동네에 실력 있는 목수가 남아있지 않은 집주인과, 세계에서 가장 실력 좋은 목수를 보유한 이웃집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집주인(미국)은 직접 목수를 키우는 대신, 이웃집(한국)에 ‘우리 집을 지어달라’며 공사비를 미리 맡기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국가 안보와 직결된 ‘군함’이라는 집은 함부로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 게 원칙이라, 상선 건조 협력과 군함 건조 협력은 진행 속도와 개방 정도가 다릅니다.
카드 ② — K-방산의 실적 점프
한국투자증권 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주요 방산 4사(한화에어로스페이스·현대로템·KAI·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의 방산부문 수주잔고 합계는 2020년 21조6,000억원에서 2025년 8월 83조9,000억원으로, 5년 만에 388% 불어났습니다. 2025년 한 해 확정 실적만 봐도 이 4사의 합산 매출은 40조4,526억원(+79.5% YoY), 영업이익은 4조6,324억원(+74.6% YoY)을 기록했습니다. 수주잔고는 4사 합산 12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폴란드에 K2 전차·K9 자주포를 판 것을 시작으로, 중동에는 천궁-II 미사일 방어체계를, 필리핀·이라크에는 FA-50 전투기를 수출하며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카드 ③ — SIPRI 4위, 세계가 인정한 순위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하는 세계 무기수출 순위에서, 한국은 2024년 단년 기준 점유율 6.0%로 세계 4위에 올랐습니다. 미국(42%)·프랑스(10%)·이스라엘(7.8%) 다음입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SIPRI 순위, 두 가지를 헷갈리지 마세요 SIPRI 순위는 두 가지 다른 기준으로 발표됩니다. ① 5년 누적(2021~2025)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세계 9위입니다. ② 특정 한 해(2024년) 단년 기준으로 보면 세계 4위까지 올라갑니다. 5년 평균으로는 아직 9위지만, 최근 1년의 ‘가속도’만 놓고 보면 4위까지 치고 올라왔다는 뜻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순위를 인용할 때는 반드시 어느 기준인지 함께 밝히겠습니다. 참고로 이 순위는 ‘무기 이전량’ 기준이라, 기업별 ‘매출’ 순위(뒤에서 다룰 SIPRI 100대 방산기업 순위)와는 별개의 지표입니다.
2. 조선·방산 밸류체인 4단계 지도
반도체가 설계→제조→후공정, 전력·원전이 발전→송배전→저장으로 이어졌던 것처럼, 조선·방산도 몇 개의 큰 갈래로 나눠 봐야 이 산업 전체가 왜 동시에 들썩이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조선·방산은 사실 두 개의 다른 산업(조선업과 방산업)이 국내에서는 HD현대·한화 같은 몇몇 그룹 안에 함께 묶여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아래 네 갈래로 나눠서 접근합니다.
| 단계 | 이 단계가 하는 일 | 이번 시리즈에서 만날 기업 |
|---|---|---|
| ① 상선·에너지선박 | 배를 만들어 판다 — LNG운반선·컨테이너선·탱커 |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 미쓰비시重, Fincantieri |
| ② 지상·항공 무기체계 | 육지·하늘의 무기를 만든다 — 전차·자주포·전투기·미사일 |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KAI, 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 / Rheinmetall, RTX |
| ③ 해양방산·MRO | 군함·잠수함을 만들고, 남의 나라 군함도 고쳐준다 |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 / Huntington Ingalls Industries |
| ④ 조선·방산 소부장 | 위 세 단계에 부품·소재·엔진을 댄다 | 한화시스템, 풍산, STX엔진, 아이쓰리시스템, 한화엔진 |
이 네 갈래는 반도체·전력·원전처럼 원료에서 완제품으로 이어지는 ‘일직선 조립 라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네 개의 사업 영역에 가깝습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HD현대중공업이 상선(①)과 해양방산(③)을 동시에 만들고, 한화그룹이 한화오션(①·③)·한화에어로스페이스(②)·한화시스템(④)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이 네 갈래가 몇 개의 대기업 안에서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이 네 갈래로 들어가기 전에, 조선업이 실제로 어떻게 배를 짓는지부터 짚고 가겠습니다. 오늘날 대형 상선·군함은 배 한 척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짓지 않습니다. 대신 선체를 수십~수백 개의 ‘블록’이라는 조각으로 나눠, 각 블록을 공장 안에서 먼저 따로 조립한 뒤, 마지막에 대형 크레인으로 이 블록들을 도크(선박을 건조하는 대형 수조 형태의 시설)에 옮겨 용접으로 이어 붙이는 ‘블록건조공법’을 씁니다. 자동차를 부품 단위로 나눠 여러 라인에서 동시에 조립하는 것과 비슷한 발상인데, 이 방식 덕분에 여러 블록을 동시에 병렬로 만들 수 있어 건조 기간이 크게 단축됩니다. 한국 조선사들이 ‘빨리, 많이’ 지을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도 이 블록건조공법을 오랫동안 고도로 표준화·자동화해온 데 있습니다. 특히 LNG운반선처럼 화물창을 영하 163도로 유지해야 하는 배는, 블록 하나하나의 용접 정밀도가 조금만 어긋나도 극저온에서 균열이 생길 수 있어, 이 공법을 다루는 숙련도 자체가 곧 기술 격차로 이어집니다.
조선업 기초 개념 — 배 크기는 ‘몇 척‘이 아니라 ‘CGT’로 잽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에서 ‘한국이 세계 1위’라는 표현이 자주 나올 텐데, 그 근거가 되는 단위를 먼저 잡고 가겠습니다. 배는 크기 차이가 워낙 커서, 단순히 ‘몇 척 지었다’로는 실력을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CGT(표준화물톤수)라는 단위를 씁니다.
📌 알아두면 좋은 개념 — CGT, 배의 ‘난이도 점수’ CGT는 단순히 배의 무게가 아니라, 그 배를 짓는 데 들어가는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작업 난이도)까지 반영한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 LNG운반선은 화물창을 영하 163도로 유지해야 해서 컨테이너선보다 훨씬 짓기 까다로운데, CGT로 환산하면 이런 ‘고급 기술 프리미엄’이 숫자에 그대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CGT 기준 점유율 1위’라는 말은 단순히 배를 많이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짓기 어려운 고부가가치 배를 많이 만들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 영하 163도라는 극저온을 어떻게 유지하는지도 짚을 만합니다. LNG(액화천연가스)는 기체 상태의 천연가스를 부피를 600분의 1로 줄이기 위해 이 온도까지 냉각해 액체로 만든 것인데, 화물창 안 LNG가 운송 중 조금이라도 데워지면 다시 기체로 변하며 압력이 위험한 수준까지 치솟을 수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화물창 벽은 ‘멤브레인’이라 불리는 아주 얇은 특수 금속(인바) 막과, 그 뒤를 받치는 여러 겹의 단열재로 이뤄져 있는데, 이 얇은 막이 선체가 파도에 흔들릴 때마다 LNG의 무게와 출렁임을 그대로 견뎌내면서도 냉기를 한 치의 오차 없이 가둬야 합니다. 이 멤브레인형 화물창을 설계하는 원천기술은 프랑스 GTT라는 회사가 독점하고 있어, 한국 조선사들은 배를 지을 때마다 이 회사에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 이야기는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글로벌 조선 시장, 한국은 몇 등일까
클락슨리서치 집계 기준 2024년 글로벌 조선 시장(CGT 기준 점유율)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국가·지역 | 점유율 | 특징 |
|---|---|---|
| 중국 | 53% | 물량 압도적 1위. 다만 값싼 범용 선박(컨테이너선 등) 위주 |
| 한국 | 28% | 물량은 2위지만, LNG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 |
| 일본 | 12% | 2025년 2위 조선사 이마바리조선이 업계 재편 주도 |
| 유럽 | 4% | 크루즈선 등 특수 선박 중심 |
숫자만 보면 중국이 압도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물량 경쟁 대신 ‘아무나 못 짓는 배’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2026년 국내 주요 조선사의 신규수주 비중을 보면 LNG운반선이 33%, 해양플랜트가 21%, 특수선이 18%로, 중국이 72%를 장악한 범용 컨테이너선(한국 점유율 약 22%)은 오히려 피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이 왜 통했는지는 2부에서 LNG운반선 이야기로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방산업은 왜 다른 산업과 다를까
3~4부에서 개별 방산기업을 만나기 전에, 이 산업만의 독특한 사업 구조 하나를 짚고 가겠습니다.
💡 쉽게 비유하면 — 방산업은 ‘평생 A/S 계약이 딸린 판매’ 일반 제조업은 물건을 한 번 팔면 거래가 끝나지만, 방산업은 무기 하나를 팔면 그때부터 20~30년짜리 관계가 시작됩니다. 전차·전투기·군함은 팔고 나서도 부품 교체, 정비, 성능개량(업그레이드) 수요가 수십 년간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산기업의 ‘수주잔고’에는 이런 장기 A/S 물량까지 포함돼 있어, 다른 제조업보다 훨씬 안정적인 미래 매출을 미리 확보해둔 셈입니다. 또 하나 다른 점은, 고객이 개인이나 기업이 아니라 대부분 ‘정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출 하나가 성사되려면 회사의 기술력뿐 아니라 양국 정부 간의 외교 관계, 그리고 수출 허가라는 정치적 절차까지 함께 통과해야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 앞으로 자주 등장할 방산업 특유의 용어 세 가지도 미리 정리하겠습니다. MRO는 유지보수(Maintenance)·수리(Repair)·정비(Overhaul)의 줄임말로, 무기를 판 뒤에도 계속 이어지는 수십 년짜리 사후관리 사업 전체를 가리킵니다. G2G(Government to Government, 정부간 계약)는 기업이 해외 고객사에 직접 물건을 파는 일반적인 수출과 달리, 파는 쪽 정부와 사는 쪽 정부가 계약의 당사자가 되는 방식으로, 무기 수출이 곧 외교 사안이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절충교역은 무기를 수출하는 나라가 그 대가로 수입국에 기술 이전이나 부품 발주 같은 반대급부를 제공하기로 약속하는 조건인데, 수입국 입장에서는 자국 방산 산업을 키우는 지렛대로, 수출국 입장에서는 계약을 따내기 위한 협상 카드로 쓰입니다.
다만 수주잔고가 두둑하다고 그 돈이 곧바로 매출로 잡히는 것은 아닙니다. 조선업과 마찬가지로 방산업도 계약 시점과 실제 매출 인식 시점 사이에 상당한 시차가 있는 대표적인 ‘수주산업’인데, 이 구조는 2부에서 조선업 사례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2부에서는 ①상선·에너지선박을, 3부에서는 ②지상·항공 무기체계를, 4부에서는 ③해양방산·MRO를 각각 깊이 파고들고, ④소부장은 3~4부에서 다룬 기업들과 함께 소개하겠습니다.
3. 왜 네 갈래가 동시에 뜨는가 —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입니다
① 전 세계적인 재무장 물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국방비를 늘리고 있습니다. 독일의 2026년 국방예산은 약 1,080억 유로(약 160조원)로, 유럽 최대 방산기업 Rheinmetall 한 곳의 2025년 수주잔고만 638억 유로(약 94조원)에 달합니다. 중동 역시 이스라엘-이란 갈등, 후티 반군 리스크 등으로 방공망 수요가 커지고 있습니다.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가 늘어날수록, 무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의 몸값도 함께 오릅니다.
② 미국의 조선 캐파 부족
1920년 제정된 미국 존스법은 미국 내 항구를 오가는 선박은 반드시 미국에서, 미국인이, 미국 자재로 지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법을 지킬 수 있는 미국 조선소의 생산능력은 수십 년째 쇠퇴해왔습니다. 클락슨리서치 집계 기준 미국의 전 세계 상선 건조 점유율은 0.1%에 불과합니다. 미 해군 함정마저 노후화·정비 적체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국 캐파를 살릴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의 생산능력을 직접 빌리는 쪽을 택했습니다. MASGA와 한화오션의 미국 필리조선소 인수, 미 해군 함정 정비(MRO) 수주가 모두 이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③ 한국의 이중 경쟁력 — 가성비와 생산능력
한국이 이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옆에 있어서’가 아닙니다. 현대로템의 K2 전차는 매년 생산능력을 15%씩 늘리고 있는데, 이는 독일 레오파르트(월 3대)나 미국 에이브람스(연 60대) 대비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입니다. 조선업에서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선종인 LNG운반선을 2024년 한 해에만 48척 건조했습니다. 같은 기간 중국은 28척에 그쳤습니다. ‘빨리, 많이, 잘’ 만드는 능력 자체가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이 됐고, 한국은 조선과 방산 양쪽에서 이 능력을 증명해왔습니다.
4. 그늘도 있다 — 균형 잡힌 시각
다만 이 모든 흐름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2026년 7월 6일, 최대 60조원 규모로 알려진 캐나다 차세대 잠수함 사업(CPSP)의 우선협상대상자로 독일 TKMS가 선정됐습니다. 한화오션은 차순위 지위에 그쳤고, 발표 당일 한화오션 주가는 전일 대비 22.83% 급락하며 정적 변동성완화장치(VI)가 발동됐습니다. 잭팟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불발됐을 때의 낙폭도 컸던 사례입니다.
⚠️ 앞으로 계속 짚어야 할 리스크 유럽연합(EU)은 2025년 3월 발표한 재무장 계획(SAFE)에서, 1,500억 유로 규모의 대출을 받으려면 국방 조달의 65% 이상을 EU 역내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 ‘유럽산 우선’ 기조가 향후 국방조달지침 개정으로 명문화되면, 한국의 유럽 방산 수출에 구조적 제약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밖에도 중국의 LNG선 건조기간 단축(24~30개월로 한국에 근접), 조선 슬롯 공급과잉 우려, 환율 변동 등이 이 시리즈 내내 반복해서 짚어야 할 리스크입니다.
5. 이 흐름이 말해주는 것 — 네 가지 해석
213조원 MASGA 프로젝트와 캐나다 잠수함 차순위 판정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단순히 ‘조선·방산이 뜨겁다’는 헤드라인 너머로 몇 가지 날카로운 시사점이 보입니다.
① 조선과 방산이 한 지붕 아래 있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한화오션이 LNG운반선과 군함을 동시에 만들고, HD현대중공업이 상선과 해양방산을 함께 다루는 건 그저 사업 다각화가 아닙니다. 두 산업 모두 두꺼운 강판을 정밀하게 절단·용접해 거대한 구조물을 조립하는 ‘블록건조공법’이라는 같은 제조 DNA 위에 서 있습니다. 상선을 짓던 도크와 크레인, 그리고 그 도크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용접·의장 숙련 인력을 그대로 군함 건조에 옮겨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도체의 파운드리가 팹리스마다 다른 설계도를 받아 그대로 찍어내는 것과 달리, 조선·방산은 ‘큰 쇳덩이를 정밀하게 다루는 능력’ 자체가 상선이든 군함이든 공유되는 범용 자산이라는 점에서, 이 산업의 다각화는 오히려 매우 자연스러운 결합입니다.
② MASGA는 축복이자 동시에 시험대입니다
미국이 213조원을 걸고 한국에 손을 내민 것은 분명한 기회이지만, 동시에 미국은 100년 넘게 자국 조선업을 보호해온 존스법이라는 장벽을 스스로 세워둔 나라이기도 합니다. 자국 산업을 지키려던 법이 오히려 자국 조선업을 고사시켰고, 이제는 그 빈자리를 외국(한국) 기업에 메워달라고 요청하는 역설적인 상황인 셈입니다. 이 모순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로 협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MASGA는 한국에게 축복인 동시에 ‘외국 기업이 미국 안보 자산에 얼마나 깊이 들어갈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무대이기도 합니다. 상선 협력은 빠르게 진행되는 반면 군함 건조 협력은 훨씬 조심스럽게 단계를 밟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시험대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③ 숫자 하나로 이 산업의 순위를 판단하면 안 됩니다
SIPRI 순위가 5년 누적 기준(9위)이냐 단년 기준(4위)이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되는 것처럼, 조선업 점유율도 ‘척수’냐 ‘CGT’냐에 따라 한국의 위상이 달라집니다. 척수 기준으로만 보면 중국의 압도적인 물량에 가려지지만, CGT(기술 난도를 반영한 단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아무나 못 짓는 배’ 전략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런 지표의 다중성은 이 산업을 홍보하거나 폄하하려는 쪽 모두에게 유리한 숫자를 골라 쓸 여지를 주는데, 그래서 이 시리즈에서는 인용하는 숫자마다 어떤 기준인지를 매번 명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세계 1위’나 ‘세계 4위’ 같은 표현을 볼 때마다, 그 뒤에 숨은 기준을 한 번 더 확인하는 습관이 이 섹터에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④ 이 산업은 반도체·전력원전보다 프로젝트 하나의 무게가 훨씬 무겁습니다
캐나다 잠수함 사업 하나에서 차순위로 밀렸다는 소식만으로 한화오션 주가가 하루 만에 22.83% 급락했다는 사실은, 이 산업 특유의 변동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도체·전력원전은 여러 고객사·여러 계약이 쌓이며 실적이 비교적 완만하게 움직이는 반면, 조선·방산은 수십조 원짜리 개별 프로젝트 하나가 그 자체로 실적 전망을 뒤흔들 만큼 계약 단위가 극단적으로 큽니다. 이는 큰 잭팟이 터지면 주가가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유력하게 점쳐지던 계약 하나가 불발되는 순간 그만큼 가파르게 꺾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를 읽을 때는 ‘수주잔고 총액’이라는 큰 숫자보다, 그 안에 아직 확정되지 않은 대형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비중으로 걸려 있는지를 함께 살피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6. 오늘 배운 내용 한눈에 정리
🔑 핵심 정리
① 한국은 213조원 규모 MASGA 프로젝트로 미국의 러브콜을 받았고, 동시에 방산 4사 수주잔고 120조원을 돌파하며 SIPRI 단년 기준 세계 4위 무기수출국으로 도약했습니다.
② 조선·방산 밸류체인은 상선·에너지선박(①) / 지상·항공 무기체계(②) / 해양방산·MRO(③) / 소부장(④)의 네 갈래로 나뉘며, 반도체·전력원전과 달리 몇몇 대기업(HD현대·한화) 안에서 여러 갈래가 함께 묶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③ 이 모든 흐름의 배경에는 전 세계 재무장 물결, 미국의 조선 캐파 부족, 한국의 생산능력·가성비 경쟁력이라는 세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④ 다만 캐나다 잠수함 사업 차순위 판정 사례처럼, 이 기회가 항상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균형 잡힌 시각도 함께 가져가야 합니다.
7. 마무리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위대한 회사’라 부른 한화, 그리고 이 회사가 속한 조선·방산 산업 전체가 지금 왜 주목받는지, 오늘 큰 그림을 잡아봤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이 네 갈래를 하나씩 깊이 파고들겠습니다.
- 2부 — 상선·에너지선박: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초격차를 가진 LNG운반선 이야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건조 프로세스·기자재 생태계, 그리고 세계 1위 자리 뒤에 숨은 화물창 기술 로열티 이야기까지 살펴봅니다.
- 3부 — 지상·항공 무기체계: K9 자주포·K2 전차·천궁·FA-50이 어떻게 폴란드에서 이라크까지 팔려나갔는지, 수출 계약의 타임라인과 정부간 계약(G2G)·절충교역 구조까지 따라갑니다.
- 4부 — 해양방산·MRO: 잠수함·군함 건조와 미 해군 함정 정비(MRO) 시장을 가로막는 미국 법률 장벽, 그리고 이 시리즈 초반에 소개한 캐나다 잠수함 차순위 사건의 전말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글
⚙️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마스터하기
-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①] 213조 프로젝트와 잭팟, 조선·방산이 동시에 뜨는 이유
-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②] 상선·에너지선박, LNG선 초격차의 비밀
-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③] 지상·항공 무기체계, 폴란드부터 이라크까지
-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④] 해양방산·MRO, 잠수함과 미 해군의 러브콜
- [허브: 조선·방산 밸류체인 총정리 완결편] 이 지도 하나면 끝입니다
본 글은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실적·점유율·목표주가 등은 각 증권사·시장조사기관의 추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확정된 사실과 전망을 구분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